[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가톨릭 신자로서 다른 교파의 주일 전례에 참여한 것으로 주일미사를 대신할 수 있는지요? 또한 다른 교파의 성체를 영할 수 있는지요?”

이 질문이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에 얽힌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몇 년 전,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예수회 공동체로 페트로스 수사가 저를 초대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페트로스는 제가 프랑스 빠리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했던 그리스 국적의 학생 수사였습니다. 당시에 저 역시 학생이었던지라 방학 하나는 제대로 챙길 수 있었기에, 이때를 이용해 휴가를 간다거나 밀린 학업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방문은 8월 후반 약 2주 정도 시간을 내서, 졸업을 위해 제출해야 할 소논문 집필과 관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리고 나섰던 휴가였습니다.

페트로스가 공동체 자가용을 운전해줘서 아테네를 거점으로 코린토와 델피 신전 등 인근 지역을 둘러봤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저는 사흘 정도 시간을 내서 그 유명한 산토리니 섬에도 가서, 노을에 물든 바다와 흰 집들, 그리고 에게 해 바다 빛을 닮은 파란 지붕들을 찍고 와야 하겠다고 내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그곳 공동체에 머무는 동안 친숙해진, 달레시오스 신부님은 저보고 세례명이 요한이니까 요한이 묵시록을 집필했다는 저 아래 파트모스 섬에 다녀와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앗 이런, 일이 꼬였군’이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사도 요한이란 것을 부인할 수 없었으며 신부님의 우정 어린 충고를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행선지를 바꿔 홀로 파트모스 섬으로 향했습니다(페트로스는 다른 일정이 있다고 저보고 혼자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오후 2시 무렵에 아테네 부두를 출발해서 12시간이 넘도록 배를 타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새벽에 선착장에 내렸고, 그 밤에 민박집 손님들을 한 명이라도 잡으려고 부두에 나와 광고를 하고 계신 할머니들의 손길을 못 본 체하며 밤길을 걸어 사도 요한(그리스에서는 사도 요한이라 부르기 보다는 ‘신학자’라고 더 많이 부르는 듯 했습니다)의 유적이 있는 지역까지 언덕을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성 요한 수도원이 손에 잡힐 듯한 곳에서 노숙을 했습니다.

이른 새벽, 수도원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깨었다가 다시 선잠이 들었지만 이내 언덕을 지나가고 있는 양떼의 울음과 그 목에 달린 방울 소리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으며 수도원의 문이 열리자 그곳을 시작으로 섬을 둘러보는 하루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날은 주일이었고, 저는 그 지역 교회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왔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관광지도도 펼쳐봤으나 파트모스 섬에는 가톨릭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는 사실상 정교회,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가 전 인구의 97%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톨릭 성당을 찾는다는 것은 전국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차라리 이 섬에서는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정교회 성당을 찾아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습니다.

아시아 사람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섬을 어렴풋이 헤매다 성가 소리가 울리고 있는 어느 교회에 이르렀는데, 저는 성당 건물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못 냈습니다. 사람들이 주일 전례를 위해 가득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전례가 지금 어느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정교회는 다른 교파의 신자들에게 매우 배타적이란 이야기도 전에 들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니 늦게 들어가서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게 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성당 마당에 잠자코 서서 조용히 전례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통 동방전례(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전례에 비해)는 2시간 정도 진행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성당 안에 자리가 없어서였는지 전례가 너무 길어서 잠시 쉬러 나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몇몇 사람들이 성당 마당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머리 위로 올라서는 태양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저를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태양은 제 머리를 달구기 시작했고, 그리스 말이란 ‘감사합니다’라는 말 이외는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전례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기에 어느 순간 저는 조용히 자리를 떴습니다. 조금 더 준비하고 갔더라면, 정교회 전례에도 제대로 참여해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다른 종파의 전례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 성당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종파의 전례에 참여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좀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런 참여는 교회일치를 위한 실천적 모습으로 격려해 볼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가톨릭의 성사 생활을 대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 교회법상 원칙입니다. 즉, 주일미사를 그 지역 성당에서 봉헌하고 나서, 정교회나 성공회 성당의 전례에 참여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교파의 주일 전례에 참여한 것만으로 가톨릭의 주일미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했듯이 파트모스 섬처럼 가톨릭 성당이 없는 곳인데, 그리스도교의 다른 교파 전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에만 그 전례에 참여하는 것을, 주일미사를 봉헌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행 중에 혹시나 가톨릭 성당은 없는데, 정교회 성당, 성공회 성당, 기타(이단이라고 여겨지는 교파가 아닌) 그리스도교파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면, 이왕이면 정교회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체에 대한 견해가 가톨릭교회와 사실상 같기 때문입니다. 즉, 정교회는 성찬 전례가 단순히 상징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성사적 의미를 잘 유지해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다른 종파의 신자들이 가톨릭 전례에 참여하여 성체를 받아 모신다고 할 때, 성체성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에게는 성체를 주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다른 종파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인상을 내비치지 않으려면 성찬 전례 예식을 통해 변화된 성체가 아닌, 제병(형태는 성체와 같으나 성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것)을 비(非)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공하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 보입니다.

기회가 되어 유럽과 지중해 지역을 여행하실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 내에(심지어 가톨릭교회 내에도) 매우 다양한 전례가 있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말, 특히 전례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더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게 됩니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전례라고 심적으로 밀어내기보다는, 새로운 지평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참여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방식을 한 가지로 획일화시킬 수 없으니까요.

해외여행 등의 특별한 경우는 아니지만, 혹시나 국내에서 교회일치운동의 차원에서 전례에 참여하고 싶으시다면, 우선 떼제 공동체(Communauté de Taizé) 기도 모임에 나가보시길 권합니다. 가톨릭 신자들만이 아니라 개신교 신자들도 제법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게 된 친분을 통해 그들의 전례에도 참여해 볼 기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떼제에서는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전례가 공존합니다.) 다른 것과 만나는 일은 도전인 만큼 풍요로움과 성장을 의미합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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