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기도가 짧을수록 좋다고 한다면, 성호경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기도란 간절함의 표현이라는 시각에서 봤을 때 “엄마야” “아! 하느님!” “앗, 예수 마리아 요셉” 등이 모두 기도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절박함에 부르짖는 소리는 짧고 강합니다. 무슨 일로 인해 깜짝 놀랐던 경험을 기억해 보면, 내가 그 순간 겪게 된 일의 충격과 시급함 때문에 나를 도와줄 누군가를 정확히 부르는 것이 기도의 내용에 앞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내 소리를 들어야 할 상대를 부르지 않고 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엄마야”에서 엄마는 내용 설명을 들으셔야 알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긴 설명 없이도 무엇으로 인해 우리가 놀랐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돌리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고, 나는 무엇을 느꼈는지 하느님께 아뢰는 습관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친밀감을 계속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성호경보다 짧은 기도는 급할 때 주로 하게 되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의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속풀이에서는 그런 비정형화된 기도가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주요 기도문 중 가장 짧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아무리 짧다고 해도 하느님의 세 위격(person, 신학에서 쓰는 어려운 말로는 hypostasis)을 부르는 기도인 만큼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성호경은 입으로 기도문을 외는 것만이 아니라 십자가를 내 몸에 긋는 행위를 동시에 하면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때 성부, 성자, 성령을 부릅니다.

저는 유럽 리그에서 뛰는 적잖은 축구 선수들이 자기 자신에게 십자가를 아주 재빠르게 긋고 나서 그라운드의 잔디를 가볍게 손으로 훑은 다음 경기장으로 달려드는 것을 볼 때마다 궁금해 합니다. ‘저 친구들, 그 몸짓의 내용은 알고 저러는 걸까?’ 어릴 때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던 유명한 축구 스타들을 보고 자란 선수들이 십자가를 그리며 바치는 이 기도의 의미는 모르고 손짓으로만 흉내를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호경은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우리가 하는 일의 앞뒤에 바치는 기도입니다. 더욱 더 넓게 이해하자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의 신앙 역사의 시작과 끝에 바치는 기도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신앙 여정의 시작 기도로서 성호경을 바친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의 마지막에도 이 짧은 기도를 바치게 될 것이고요.

삼위일체로 설명되는 ‘하나이신 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당부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어떤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우선 나 자신이 하느님께 속한 존재이고, 그런 내가 하는 기도가 하느님의 것이 되고, 내가 하는 일이 결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되기를 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끝에 다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내 신앙을 다시 고백하고, 나의 삶과 기도, 내 일상이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되고 수렴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성호를 긋는 게 부끄러워서 속으로만 성호경을 암송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뭐, 저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혹은 눈앞에 있는 먹을거리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아야 성호경을 바치는 매우 허술한 인간이기에 그런 분들이 분명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스링크에 들어서서 자신의 연기를 펼치기 전에 국민 여동생 김연아 스텔라가 보여주는 모습에 감탄만 하실 것이 아니라, 나도 연아처럼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십자가를 고백하는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짧은 기도는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일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는 기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 자신에게 십자가를 그어 줌으로써 스스로를 축복하고 격려해 주고 있다는 것이 새롭고 놀랍지 않나요?

내가 나 자신에게 해 주는 축복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마음의 태도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실제로는 그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결국 대단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격려해 주는 행위 자체도 매우 의미가 큰 것인데 그것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더더욱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과 그들 가족들을 보며 함께 울고 마음 아파하고 우울함에 빠져 있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계속 그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을 기억하고 축복해 달라고 우리가 함께 하느님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짓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성호경이 알려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