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얼마 전에 지인으로부터 받은 질문입니다. 자신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 배우자는 가톨릭 신자지만 열심한 편이 아닌 이 친구는, 가톨릭이 동성애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고 배타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제 지인과 같은 분들이 또 있을지 몰라서 이번 속풀이에서 다뤄 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교회를 머리에 그리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적 소수자들에게 배타적인 교회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공식 입장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고, 어떤 사람도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동성애 경향을 가진 이들도 주저 없이 맞아들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같이 살도록 초대받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곧 모든 것을 그러안는 모습에 있습니다.

교회가 남녀, 즉 이성의 만남과 혼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을 남자(수컷)와 여자(암컷)*로 창조하셨고 이 두 존재가 나중에 만나서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의 상태로 있을 때는 온전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성경의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히브리어 본문은 엄밀히 따져서 ‘남자’와 ‘여자’가 아닌 동물 수준의 성 구분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지칭되기 전의 단계를 이 단어들을 통해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동성애 커플 이야기를 다룬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2010)의 한 장면

이런 맥락에서,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 사제, 수도자, 독신 생활자들은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슬픈 운명을 지닌 걸까요?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지는 말아 주세요. 이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다른 방식에 따라 온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닮는 방법이 꼭 한 가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겪고 그들과 우정을 나누고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이들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창조와 관련된 좀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하느님의 섭리를 설명한다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오늘날의 이해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성경을 쓸 당시만 해도 사람에 대한 인류학적인 이해는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것을 중시했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창조 사업의 협조자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는데, 곧 결혼의 목적이 아기를 낳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런 성(性) 경향성, 즉 이성애 외의 다른 관계는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것에 위배된다는 견해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졌으므로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성에 끌리는 경향을 지닌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적극적으로 그 역시 교회 공동체의 일원임을 느끼도록 해 줘야 합니다. 그는 사실상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아픔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성애든 동성애든 정서적인 측면, 곧 사랑을 느끼고 존중해 주고 그 감정을 나누는 것은 권장해야 할 일이지요.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만큼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체험, 곧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마음을 알아듣는 데 중요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동성 커플의 결혼과 입양을 통한, 혹은 인공수정을 통한 아기의 양육 등에 대해서는 사실상 교회가 동의하지 않는 바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인공수정 자체가 자연스러운 창조질서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그렇고, 전자는 앞서 설명한 전통적인 결혼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동성애자들 사이의 아이 양육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른들만의 입장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아기의 권리도 생각해 보라는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아기에게 아빠만 둘, 혹은 엄마만 둘인 것은 일종의 차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기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다 필요합니다.

제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게이(남성 동성애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친한 친구지요. (‘다행히도’ 이 친구는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였다면 사실상 독신으로 ‘독신’―독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교회의 가르침에 상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가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성장했으며, 동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자신을 숱하게 부인해 봤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자기 고백을 했을 때, 사실 처음으로 진지하게 동성애자에 관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들려준 친구에게 감사했으며, 신자들 중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도 우정을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소수자들은 사회적인 ‘왕따’를 당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한 마리의 어린 양도 잃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심을 안다면, 왜 그런 이들이 생겨났는지 묻기보다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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