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동네의 교황 흔적 지우기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난 개신교 신자의 ‘마치 4박 5일간 꿈을 꾼 것 같았다’는 고백처럼 온 나라가 교황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에 울고 웃었던 감동의 도가니였다. 기어이 프란치스코 신드롬까지 남겼던 방한이었다.

곳곳에서 울렸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예언자적 외침들

그런 와중에도 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비행기 트랩에 오르는 순간까지 교황은 자신이 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모두 전하고 떠났다. 26년간의 보수적 교황 시대를 접고 지난해 개혁적 교황이 선출되자 뜻있는 이들은 교회 쇄신을 위한 제3차 바티칸공의회를 강력히 요구했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로 쇄신과 적응(aggiornamento)의 제3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미 시작된 듯하다. 굳이 전 세계 모든 주교들을 다시 바티칸에 모을 필요가 없었다.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프란치스코와 마음과 뜻을 함께 하는 모든 이와 더불어 이미 교황 스스로 공의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쇄신의 바람을 일으키는 프란치스코 자신이 제3차 바티칸공의회 자체인 듯도 느껴진다. 이번 방한 때 교황의 모든 메시지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읽는 기분이 든 것도 그런 까닭이었으리라.

교황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가는 곳마다 울렸다. “번영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을 저버리지 말라”는 주교들을 향한 외침에서, “성직자중심주의와 세속성의 온갖 유혹을 물리쳐라”는 사제들에 대한 당부에서,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친다”는 수도자들을 향한 경고에서, “현세 질서를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우고 완성시키는 사명을 수행하라”는 신자들에 대한 격려에서, “잠들어 있는 사람은 기뻐하거나 춤추거나 환호할 수 없다. 깨어 일어나라”는 청년들을 향한 촉구에서, “교회가 이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적극 참여해 그 해결에 기꺼이 이바지하도록 하라”는 한국 교회에 대한 권고에서 우리는 광야의 소리를 들었다.

더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라”는 국민들을 향한 호소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강화되기를 희망한다”는 정부를 향한 따끔한 일침에서, “모든 한국인이 같은 형제자매이고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남북한을 향한 간절한 부탁에서, “아시아 대륙과 대화하기 위해 아시아인들의 경험, 희망, 소망, 고난과 걱정을 들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배양하라”는 아시아 주교들을 향한 주문에도 예언자의 목소리는 살아있었다.

교황 방문 후 단 한 달 만에 감동의 흔적을 지우려는 움직임들

하지만 이런 예언자의 외침이 한국 교회에는 너무 버거웠던 것일까. 교황이 떠난 지 한 달, 그가 남기고 간 메시지를 교회 쇄신에 접목시키려는 가시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교황 방문의 흔적을 지우는 안타까운 움직임들이 감지된다. 교황의 “고통받는 자 앞에 중립은 없다”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염수정 추기경의 ‘세월호 유가족 양보’ 운운 발언을 비롯하여 꽃동네의 국고보조금 진실 밝히려던 작은예수회 박성구 신부에 대한 서울대교구의 직무정지 조치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단 한 달 만에 교황 방한의 감동은 그렇게 새벽안개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

꽃동네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나왔다. 꽃동네 방문에서 교황이 “자선사업에서 나아가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여 모든 사람이 저마다 품위 있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기쁨을 누리게 하라”며 꽃동네가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한 이후 꽃동네에서 수용시설 장애인사업에서 사회통합과 자립을 꾀하는 방식의 장애인복지로 사업 방향을 바꾸어가겠다는 전향적 움직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추적60분’의 의혹 제기에 대한 꽃동네의 반박문과 실망스런 반응들

하지만 그 첫 반응은 ‘추적60분’의 의혹 제기에 대한 장문의 반박문이었다. 꽃동네 비판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이 자기합리화하고 구태의연한 변명으로 일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나를 포함한 장애인 당사자들이 요청해 KBS가 제작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추적60분’ 제작팀에 대한 비열한 비난들로 시청자 게시판이 도배되는 것을 보고 꽃동네에 과연 복지 마인드가 있는가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심지어는 여느 정치인들이 하듯 대단히 정치적인 방법으로 이념대결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까지 포착되었다. 꽃동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런 안쓰러운 몸짓들에서 장애인 사랑을, 예수 정신을, 휴머니즘을 찾아볼 수 있을까. 꽃동네 문제를 제기할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한 바였지만 몹시도 씁쓸한 장면이었다.

▲ 지난 8월 16일, 충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이 음성 꽃동네 교황 방문 행사장에 들어가려다 사제와 경찰들로부터 제지 당하고 있다. ⓒ송상호

솔직히 나는 오웅진 신부의 과거 비리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지금 꽃동네 문제의 본질은 비리가 아니라 그들이 올바르게 장애인복지사업을 하고 있느냐이다. 장애인복지 전문가로 나의 유일한 관심도 그것이다.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 했던가. 지난날 수용시설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설사 꽃동네 성장의 ‘흑역사’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지금 올바르게 장애인복지사업만 한다면 나는 기꺼이 용인할 것이다. 그래서 꽃동네 반박문의 전반부는 내게 별 의미가 없기에 장애인복지 관련 내용인 7항에서 10항까지 답변하고자 한다([ ] 부분이 꽃동네의 반박문).

국고보조금 확보를 위해 ‘전국구’ 복지시설 꽃동네 위한 ‘꽃동네법’까지

[7. 복지예산이 꽃동네에 집중된다는 주장에 대하여....국고보조금은 각 개별사회복지법에 근거하여 적법하게 지원받고 있고 그 집행 내용은 투명하게 해당관청에 보고하고 있으며 지원예산중 3/4 정도가 인건비로 지출됩니다.]

꽃동네완 무관하다지만 가평군의 경우 집행기관인 지자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앙 정부에서 “꽃동네”라고 딱 찍어서 예산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리하여 가평군 담당 공무원과 음성군 주민의 증언대로 ‘군의 복지예산의 큰 부분을 가져가는 꽃동네 때문에 군민들이 받아야 할 복지혜택을 군비 부담만큼 받지 못한 것이 현실’이며 그로인해 음성군과 가평군은 재정적인 열악함을 감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고자 꽃동네에서는 새누리당 경대수 의원(괴산,음성,진천,증평)  주도 하에 대규모 수용시설의 경우 전액 국비로 지원하자는 내용의 일명 ‘꽃동네법’(보조금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계류 중이고 최근에는 기획재정부로부터 지원 자체를 거절당했다.

[8. 꽃동네가 대형복지시설이라서 나쁘다는 주장에 대하여....참된 복지는 크기가 문제가 아니고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꽃동네를 소형화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막대한 예산(시설의 개수와 그에 따른 직원 수 등)을 국가가 지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복지선진국처럼 고액의 세금을 납부해야 가능하며 어느 곳이나 복지시설이 들어서도 반대 민원이 없어야 하는 복지의식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선진국에서 수십 년 전부터 수용시설 중심의 장애인복지정책에서 사회통합과 자립생활 중심으로 정책 전환을 이룬 가장 큰 이유는 실제적으로 예산과 정책을 전환해 보니 예산 절감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산적 복지, 참여적 복지, 능동적 복지, 맞춤형 복지라는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내는 복지예산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선진국 복지의 실상이다.

물론 사회통합과 자립생활의 의미는 그런 경제적 차원보다 천부인권이란 표현 그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인권 차원이다. 만일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구에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한다는 그것으로 꽃동네 같은 수용소에 갇혀서 한평생 살다가 거기서 죽음까지 맞게 하라고 한다면 과연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 여기며 기꺼이 살아갈 용의가 있는가? 꽃동네 수용장애인들에게 그런 삶을 은총이라 여기라는 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을 보면 그들이 대신 그렇게 한평생을 은총을 느끼며 살아보기를 진심으로 권하고 싶어진다.

지역사회 장애인들이 빈곤의 늪에 빠진 이유는 복지예산의 블랙홀 꽃동네 때문

[9. 꽃동네의 탈 시설화 주장에 대하여....탈 시설화, 재가 복지의 이론으로 꽃동네를 떠나 자활 생활을 하던 가족들이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화재 등의 사고에 대처하지 못해서 생명을 잃었습니다. 과연 재가 복지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왜 장애인들의 일부가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서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최근 고 송국현 씨와 고 오지석 씨처럼 화재 등의 사고에 대처하지 못해서 생명을 잃는가? 이런 장애인 환경의 열악함의 가장 큰 원인이 지역사회 장애인에게 돌아가야 할 장애인복지 예산이 꽃동네 같은 수용시설 보조금으로 들어가 지역사회 장애인이 제대로 된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는 데 있다. 대규모 장애인 수용시설을 한국 장애인복지 선진화에 걸림돌이라고 장애인들이 주장하는 이유다. 국고보조금을 비롯한 복지예산을 블랙홀처럼 삼켜버려서 지역사회 자립생활 인프라 구축을 못하게 막아 놓고서는 막상 수용시설에서 장애인들이 나가려하면 말리는 상투적 표현이 ‘지역사회 장애인복지 현실의 열악함’이다. 이렇게 장애인수용시설에 편중된 예산으로 인해 지역사회 장애인들도 삶의 질을 박탈당하며 빈곤에 허덕이는 악순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난 8월에 고발당한 구미 솔 장애인생활시설의 경우 보조금 횡령액만 6억이 넘었는데 그렇게 시설에서 눈먼 돈으로 사라지는 장애인복지예산이 얼마인지를 안다면 왜 우리나라 장애인복지가 장애인당사자는 빈곤하면서 시설만 배불리는 주객전도 상태에 빠졌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의 문제점을 비판하니 돌아오는 반응의 십중팔구가 그 여파로 꽃동네의 후원금이 줄어들까에 대한 염려였다. 이런 본말전도인 표현에서 꽃동네 장애인사업의 실상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수용된 장애인들이 탈시설하려해도 나가지 못하게 붙들어 두는 것이 장애인 수에 따라 내려오는 보조금과 관련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하는 바이다.

7항에서 “국고보조금은....그 지원예산중 3/4 정도가 인건비로 지출되고 나머지 일부가 운영비로 지출된다”고 하였는데 이런 인건비와 시설 운영비가 지역사회 장애인의 사회생활을 돕는 활동보조인 인건비로 지불되어 중증장애인에게도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가 이뤄질 수 있다면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화재 등의 사고에 대처하지 못해서 생명을 잃는’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활동보조서비스 예산이 1~2급 장애인 50만 명을 대상으로 약 4000억 원 정도다. 이를 꽃동네 예산과 비교해 보면 사회통합에 비해 수용시설이 저비용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 드러난다. 이번에 서울시에서 최중증장애인 100명을 24시간 서비스 할 수 있는 활동보조서비스 예산을 산출해봤는데 겨우 32억 원이었다. 다시 말해 예산만 적절하게 지원된다면 중증장애인들 역시 지역사회에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역사회 장애인에게 쏟는 장애인복지예산은 아직 미흡하지만 그래도 이미 장애인들이 자립생활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는 수준으로는 올라가 있다. 이런 사실을 꽃동네 같은 시설에선 애써 외면하고 있다.

장애인 사회통합을 주문한 교황의 권고를 왜곡하는 꽃동네의 반박문

[10. 교황님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인간적 발전에 애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꽃동네야말로 교황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례로 꽃동네는 장애아동들을 위한 특수학교 『꽃동네학교』를 설립하여 사회에서는 공부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특수교사들이 유치부부터 고등부까지 가르칩니다. 학생들의 자활을 위한 직업학교(제과․제빵)에서 기술을 습득하여 자립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반박은 교황의 권고를 교묘하게 반토막 낸 것이다. 교황 발언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품위 있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는 뒷부분이고 이 권고는 누가 봐도 수용시설이 아닌 사회통합을 시키라는 주문이다. 이처럼 꽃동네는 교황의 권고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외면하고 있다. 꽃동네대학교에서 장애인복지와 사회복지를 가르치는 교수들은 학자적 양심으로 이런 꽃동네의 시대착오적인 실상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밝혀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여기에서 가정이란 단어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꽃동네에 맡겨진 장애인들 대부분은 원래 가족이 있으니 그 가정으로 되돌려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가는 장애인들이 가족들과 살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주어야 할 것인데 무릇 모든 인권 발달사가 그러하듯 그것은 수용시설에 있던 장애인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일어남과 동시에 병행해서 이뤄질 것이다. 마치 여권 신장 역시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함께 제도적 변화가 동시에 이루어졌듯이 말이다.

물론 특수학교 설립, 특수교사들에 의한 교육, 자활을 위한 직업기술 등 꽃동네의 노력은 고무적인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것’조차 음성군이라는 외진 곳에 격리 수용시켜 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 그들 장애인들이 교육을 받고난 후 사회로 나가게 되느냐 아니냐는 그 장애인 수용시설이 선진국 형인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잣대다. 꽃동네가 장애인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 흐름에 동참하려면 도시친화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대도시에도 장애인 시설(물론 소규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회통합을 위해서다.

반(反)예수적 장애인 수용시설 사업, 오웅진 신부는 진작에 스스로 그만 뒀어야

무엇보다 2000년 전 예수께서 그리하였다. 예수는 지금의 꽃동네에 갇혀 있는 장애인들처럼 소외되고 울타리 밖에(루카 14, 21-22) 있던 그 시대의 장애인들을 사회공동체 내로 불러들여 함께 살게 한다. 사회공동체에 통합되지 못하고 있던 장애인들을 사회 내로 통합시키는 것이 하느님나라를 실현하는 것이라 여겼고 그것이 예수의 장애인복지 정신이었다. 오웅진 신부가 예수를 따르는 사제라면 예수의 이런 장애인복지 정신에도 어긋나는 반(反)예수적 장애인 수용시설 사업은 진작에 스스로 그만 뒀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꽃동네 폐쇄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몇 차례 언급했듯이 꽃동네가 38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 곧 복지 자원이 다른 복지분야로 전용되어져 오웅진 신부와 수도자들이 마음에 지니고 있는 복지에 대한 열정이 선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노인요양시설로의 전용을 권한 것은 요양시설의 특성 상 꽃동네의 지리적 시설적 특성과 부합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 긍정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꽃동네에서 일어나 참된 복지타운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인해 교회 쇄신의 바람이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다. 그 쇄신의 바람에 한국가톨릭교회와 꽃동네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변화를 바라는 요구에는 순응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는 시대착오적인 것은 무엇이든 쇠락할 수밖에 없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의 변화를 향한 결단을 거듭 촉구하는 바이다.

 
정중규

대구대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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