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선생 기념사업회 출범

“참 좋은 신앙인, 참 좋은 사람, 참 좋은 한국인, 김교신”

▲ 김교신(사진 제공 = 김교신선생 기념사업회)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양현혜 교수는 “한국 개신교가 자기 정화와 쇄신이 필요한 이때, 롤모델로 참 좋은 신앙인, 참 좋은 사람, 참 좋은 한국인이었던 김교신 선생을 불러내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말했다.

‘김교신선생 기념사업회’가 지난 11월 28일 서울시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9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됐다.

김교신은 흔히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날 총회에서 김교신선생 기념사업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 교수는 “먼저 당시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 김교신이 왜 무교회주의를 주장했는지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김교신이 무교회운동을 성서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연결시킨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의 한국교회처럼 그때도 성서가 제시하는 본질을 떠나서 교회가 제도와 관행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김교신과 그 동지들이 무교회주의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김교신은 서구적 기독교가 아닌 한국적 문화 토양에서 자라 열매를 맺은 조선식 기독교를 꿈꿨다. 이 교수는 “기독교 복음을 수용한 지 130년이 넘었는데도, 한국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며 “이런 비판이 나올 때마다 가장 주목하게 되는 선각자가 김교신과 그의 조선적 기독교”라고 설명했다.

기념사업회 창립준비위원회 총무를 맡았던 양현혜 교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현재 한국 교회는 신앙적 영성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을 함께 고려하는 균형이 필요한데, 이를 가장 잘 제시하고, 이에 맞게 살아낸 인물이 바로 김교신”이라고 강조했다.

▲ 김교신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지난 11월 28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9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배선영 기자

김교신은 1919년 열아홉 살 나이에 함흥 장날 만세를 부르다 학생 시위 주모자로 지목돼 피난하듯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길거리에서 전도사의 노상 설교를 듣고 기독교인이 된 후, 무교회주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문하에서 7년간 성서를 배웠다.

1927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동인 송두용, 정상훈, 함석헌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행했다. 그는 1942년에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개구리를 일제탄압을 견뎌내는 조선민족에 비유한 ‘조와(弔蛙)’를 발표해 1년간 복역했고, <성서조선>은 폐간됐다.

1940년 3월에는 12년간 교사로 일하던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수업 중 일본어 사용 문제와 창씨개명 거부로 교직을 그만뒀다. 복역 뒤에는 일본질소비료회사 용흥 공장에 들어가 5000여 조선인 노동자들의 교육과 복지를 위해 일했다. 그곳에서 발진티푸스에서 걸린 노동자를 간호하다가 전염돼, 1945년에 4월 광복을 넉 달 앞두고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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