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민인권헌장 선포 무산을 안타까워하며

대림시기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때’이자 사람이 되어 오시는 구세주를 깨어 기다리는 ‘때’이다. 그분은 왜 오셨는가. 차별, 배제, 소외가 키워드인 장애인운동을 하는 내겐 늘 그 차별, 배제, 소외를 없이한 분으로 다가온다. 그분 둘레에 모인 갈릴래아 사람들의 얼굴을 보라. 세리, 창녀, 여성, 장애인, 가난한 이들, 그 시대 유대 사회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못해 울타리 밖에서 헤매며 사람대접 받지 못하던 밑바닥 인생(Am ha'aretz) 민중(Ochlos)이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난도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고단한 삶에 쫓겨 지키지 못한 율법 때문에 죄인 취급당하는 딱한 그들을 그분은 무조건 무죄 방면시켰는데, 요즘으로 보면 ‘생계형 범죄자’에 대한 사면 행위였다. 하느님나라는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음으로 실현된다고 보셨기에 몸소 소외된 이들을 찾아 나섰던 그분이다.

동성애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

오늘 이 시대 그분께서 다시 오신다면 누구를 찾아 나설까. 일반사회보다 교회에서 더 혐오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동성애자들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은 분명하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동성애는 성행위를 생명 전달로부터 격리시킨다. 그 행위들은 애정과 성의 진정한 상호 보완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2357항)는 대목을 보라. 최근 ‘차별금지법안 발의’와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움직임에 맞서는 ‘WCC반대운동연대 및 로마가톨릭, 교황정체알리기 운동연대’ 등 일부 개신교 단체들의 동성애 반대운동 그 폭력성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동성애는 성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방임적 퇴폐를 초래할 위험행동이며, 창조 질서를 해치고 가정과 사회질서에 큰 혼란 야기하여 인류 멸망을 초래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키는 죄악이다. 동성애차별금지법은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간계다”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주교대의원대회(주교시노드)에서 동성애 문제를 의제로 삼은 것은 대단히 의미 있었다. 교황은 이미 지난해 7월에 “동성애자가 하느님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각별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물론 교황이 공론화한 동성애 담론은 보수파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가톨릭교회가 동성애자에게도 폭넓게 문을 열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중간보고서와 달리 최종 보고서는 그 내용을 삭제 당했다. 최종 보고서 투표를 앞두고 ‘동성애자도 은사(gifts)가 있으며, 가톨릭 사회에 헌신할 자격이 있다’는 문구를 ‘동성애 성향이 있는 남녀를 존중하는 태도로 환대해야 한다’로 수위를 낮추며 교황청은 보수파와 타협하려 했지만, 이 문구를 최종 보고서에 넣을 것인가를 묻는 투표는 118명 찬성에 62명 반대로 전체 참석자 2/3 이상의 찬성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최종보고서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소극적인 언급에 그쳤으며, 결혼은 남녀만 할 수 있다고 확실한 선을 그었다. 하지만 2/3 이상 찬성 조건은 채우지 못했지만 절반이 훨씬 넘는 참석자가 찬성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다. 교황청 대변인의 표현대로 “최종 보고서는 끝이 아닌 시작이며 내년 10월 열리는 시노드에서 진전의 여지가 있으리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동성애 배제의 근거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런 비호감(배제)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물론 성경(동성애자 단죄의 근거로 ‘전가의 보도’처럼 드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도 사실은 동성애 문제가 아닌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은 도시의 사악함 때문에 하느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라고 보는 신학자들이 있다)과 교리를 내세우지만, 이런 혐오와 배제가 종교 신념화된 데엔 앞서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언급한대로 “동성애가 성행위를 생명 전달로부터 격리시킨다”는 것, 곧 종족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류 생존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는 까닭에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반감이 그토록 거세고 뿌리 깊은 것이다. 아마 그 뿌리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볼 수 있듯 다산의 여성을 여신으로 숭배까지 했던 원시시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지구촌 전체가 오히려 인구과밀로 몸살 않는 이 시대에 있어 그런 집단무의식의 퇴행적 정서는 이제 벗어던질 때도 되지 않았는가! 종족 보존이 꼭 육체적 유전자를 통해서만 이뤄질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에 와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한 문제는 결국 차별과 배제와 소외의 문제 곧 인권 차원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교회라면 당연히 ‘예수라면 어떠하셨을까’를 성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당시에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신 선교의 전부인양 하셨던 그분의 자세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려는 교회라면 이 문제는 당연히 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역시 “인간 기본권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사회적 신분, 언어, 종교에서 기인하는 차별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극복되고 제거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는데, 여기에 성적 지향 관련 차별이 제외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누가 무지개 깃발을 짓밟는가”의 저자 스프링클 교수는 흑인 노예 수송, 나치의 유대인 학살, 마녀 사냥과 종교재판 등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배제도 결국 사라졌는데, 이데올로기로 배제 당하는 최후의 특정 그룹일 동성애자 문제 역시 해결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무릇 인류 인권발달사가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하나 둘 받아들이는 것 외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젠 보다 더 전향적이고 성숙된 자세를 지닐 필요가 있다.

예수의 마음, 소수를 찾는 마음

동성애와 동성애자 문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되찾음으로 하느님나라가 실현된다고 보고 몸소 소외된 이들을 찾아나서 받아들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 모범에서 살펴볼 때 결국 교회 신원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백 마리 양이 함께 기뻐하기 위하여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놔두면서까지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온 들판 헤매는 그 마음이 예수 마음, 그리스도교의 바탕이다. 그런 측면에서 동성결혼식을 올렸던 가톨릭 신자 김조광수 감독이 결국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는 뉴스는 뼈아프다. 더 나아가 박원순 서울시장이 세계인권의 날에 맞춰 선포하려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이 한국 그리스도교계의 극렬한 반대 앞에 끝내 무산된 것은 뼈아픔을 지나 부끄럽기조차 하다. 예수 마음을 잃어버린 예수교, 그리스도 정신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신원과 정체성을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

장애인 복지에서도 우리 사회의 흐름에 이미 뒤처지는 한국 교회인데, 동성애 문제에서도 이젠 우리 사회가 교회를 앞서가는가.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동성애 수용 증가율이 조사대상 39개국 중 가장 높게 나왔다고 한다. ‘장애도 개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개성이다. 창조주께서 모든 피조물을 하나도 제외함 없이 모두 ‘보시기에 참 좋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창조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교회도 ‘예수 마음’으로 동참해야 할 것이다. 마침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도 이번 주교시노드의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 교구 차원에서 성소수자 포용문제를 다룰 예정이라는데, 부디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기를 바란다.

* 이 글은 우리신학연구소 월간지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2014년 12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으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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