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지난 성주간 목요일 아침에 주교좌성당에서는 1년에 한 번 있는 매우 중요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이 전례를 우리는 성유축성미사라고 부릅니다.(성유축성미사에 대해서는 “성수와 성유는 어떻게 만드나요?”도 함께 읽어 보세요)

축성 성유(크리스마 성유), 병자 성유, 예비신자 성유 세 가지로 구분되는 성유는 도유(기름 바름)를 통해 성사를 거행하거나 사람과 사물을 축복할 때 사용합니다. 축성 성유는 세례, 견진과 성품 성사 때, 그리고 성당 축성 때에도 사용합니다. 병자 성유는 이름 그대로 병자 성사를 위해서 쓰이고, 예비신자 성유는 입교 예식 중 예비신자에게 도유하는 데 사용됩니다.(가톨릭 대사전 참조)

성수와는 달리 성유는 통상적으로 주교가 축성하며, 경우에 따라 사제들도 병자 성유와 예비신자 성유를 축성할 권한을 위임 받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병자 성유의 축성은 감사기도 끝(그러니까 '마침 영광송’ 직전)에, 나머지 두 가지 기름인 예비신자 성유와 축성 성유는 미사의 영성체 후('영성체 후 기도'를 마친 다음)에 이뤄집니다.

▲2015년 춘천교구 성유축성 미사.(사진 제공 = 춘천교구 문화홍보국)

사목적 이유가 있으면 세 가지 성유를 모두 말씀 전례 뒤에 축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유축성 미사는 주교가 사제직을 수행하는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이며, 협력하는 사제들과 밀접한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교구 안의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사제들이 공동 집전을 합니다.(전례사전 참조) 이런 이유로 서로 바빠 못 만나던 동료 사제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진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이용해 사제들은 사제품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는 시간(사제들의 서약갱신)을 갖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유축성미사에 흥미를 느끼시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1년 동안 사용할 성유를 얻어 오는 목적이 아니면, 수도회 소속 사제들도 굳이 이 미사에 참석하지는 않지요. 저는 성유축성미사의 장엄함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간 인사 못하고 살았던 신부님들 얼굴 좀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미사 참례를 합니다. 얼마 전 성목요일에도 그런 마음으로 가 봤던 것이고요. 그런 기회를 이용해, 어릴 때부터 같은 본당에서 함께 자랐고 지금은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생 신부님이 옆에 앉아 있다가 질문을 해 왔습니다. 어째서 세 성유를 축성하는 때가 다르냐고.

앞서 언급했듯이, 특별한 사목적 사유가 있다면 말씀 전례 뒤에 셋 다 한 번에 축성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병자 성유 따로, 그리고 예비신자 성유와 축성성유 따로 축성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근거를 찾아보았으나 시원하게 속풀이 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전례학자 신부님께 문의를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좀 허무한 대답을 들어야 했지 뭡니까. 세 성유의 축성 시점이 다른 것은.... 전통이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속풀이 독자분들도 어째 많이 싱겁다고 느끼실 겁니다.

단지 핑계를 대자면, 그냥 ‘전통’으로 일축하게 된 사연은 비오 5세 교황의 전례 정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트리엔트공의회를 거치면서 1560-70년대에 그 시기를 기준으로 200년 전까지 지역별로 제각기 난무했던 전례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던 것입니다. 이 정비작업을 통해 200년 이상 유지되어 온 전례들만이 살아남았고, 그 정도로 오래되지 못했던 전례들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전례학자들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전례를 정비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당시의 여러 예식서들을 보관용으로라도 남겨 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비오 5세는 너무 깔끔한 교황이었나 봅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다양한 전례 행위의 기원이 어딘가에 써 있었을 법도 한데, 아예 찾아 볼 원천이 사라진지라.... ‘전통’으로 일축하게 되었던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후, 전례학자들은 설명할 근거가 없는 경우에, "음.... 전통이 그래”라고 하며 권위 있는 해석을 대신한다고 하네요. 뭐, 아쉽기는 하지만, 트리엔트공의회 이전 200년 동안의 전례자료가 없어졌기에 전례학자들은 내심 그 분량만큼은 공부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낄 것이라 어림해 봅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런 전통의 배경적 의미를 우리 나름대로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내가 직접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본 의미는 이렇습니다. 병자 성유를 감사기도 마지막 부분에 축복하는 것은 성변화 가까이에 병자들을 기억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픈 이들을 위로하시려 했던 주님이 전례적으로 가까이 계십니다. 그리고 축성 성유와 예비신자 성유의 축성은 영성체 후 기도를 마치고 파견 직전에 함으로써 세상에 파견하려는 하느님 백성의 축복을 고려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건 제 해석이고, 여러분은 어떤 의미를 이 전례에 두고 싶으신가요?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원(경기도 가평 소재) 운영 실무
서강대 '영성수련'  과목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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