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역사 화해의 발길

수난과 죽음이라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생애의 결정적 순간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은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과 갈등하는 장면들로 이어진다. 제자들은 그분과 전혀 다른 꿈을 꾸면서 동행하고 있으니, 수난 그날의 배반도 돌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토록 감동적으로 불림 받고 선택되었던 제자들이 이토록 스승을 몰이해하고 기어이 배반까지 할 수 있을까. 종교권력과의 대립에다 제자들과의 갈등까지 이중고에 시달렸던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쓰럽기조차 하다.

사마리아 동네에서 거부당하자 분개한 제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불살라 버리자’하다 그분께 꾸지람 듣는 장면(루카 9,51-56)도 그 하나다. 예루살렘 상경 길에 사마리아 동네를 일부러 들른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차별받았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대단히 전략적 사랑으로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이후 설교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참된 이웃사랑의 모범으로 내세우신 것도 그런 것이었다. 그런 예수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제자들이 사마리아 동네를 번갯불로 멸망시키자고 들고 일어나자 그분께서 크게 꾸짖으며 하시는 말씀이 바로 ‘어떤 사본’에 나오는 “너희는 자기들이 어떠한 영에 속하는지 모르느냐?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왔다”다.

내가 오래 전부터 감동받는, 그분의 마음이 가장 온전히 드러난 장면이다. 그뿐 아니다. 바로 앞 단락에는 파견되었다 돌아온 제자들이 그분께 보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못 하게 막아 보려 했습니다” 하자 예수께서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시는데, 그분의 자비심에서 나오는 관용과 넉넉한 포용력은 가히 현대의 톨레랑스를 무색케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 지난 7월 9일 볼리비아에서 열린 제2차 민중운동세계총회에 참가한 프란치스코 교황.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발도파 신자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용서 청한 프란치스코 교황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역사 화해를 위한 발걸음이 바쁘다. 지난 7월 9일 볼리비아에서 열린 제2차 민중운동세계총회에 교황은 참가한 남미 토착 민중 운동가들을 보며 “누군가는 아마 ‘식민주의 문제에서 교황은 항상 교회가 한 일에 대해서는 묵과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라고 운을 뗀 뒤 “애석함을 담아 이 이야기를 한다. 지난 ‘아메리카 정복시대’에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죄, 특히 예수의 이름으로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중대한 죄에 대해 겸허한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또한 지난 6월 22일에는 교황으로서 처음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발도파 교회를 방문하고 12세기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몰아 몇 세기에 걸쳐 수많은 신자들을 죽이며 박해했던 발도파 신자들께 정식으로 사과했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믿음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 앞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보인 비그리스도교적이고 심지어 비인간적인 태도와 행동에 대해 가톨릭교회를 대표해서 사과한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교황의 이런 사과는 발도파 교회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잔인한 박해가 있은 지 700년 만에 처음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런 행보는 ‘가정 사목과 복음화’를 주제로 열리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동성애와 이혼, 재혼 등과 관련된 논의를 주도하는 것과 더불어 이제껏 교회가 완고한 자세로 애써 외면해 왔던 교회의 어두운 그림자 그 트라우마를 치유시키는 고무적인 몸짓이 아닐 수 없다.

영성의 대가들조차 피하지 못한 교도권의 칼날

라틴아메리카의 슬픈 역사, 특히 발도파 교회 잔혹사를 보면서 지나간 교회사에서 무수히 잘못을 저지른 교도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런 교도권, 소위 정통교회에 편입되어 일원으로 남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2000년 흰개미탑에, 예수께서 언급하신대로 세상 끝날 때까지 영원할 거기에 흔적을 남기겠다는 것인가. 물론 우주목에 비겨도 무방할 만큼 인류역사 속의 그리스도교라는 기둥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것은 ‘2000년 역사’나 ‘종말 때까지’라는 시간적 의미나 20억 명이 넘는 세계 최대 집단이라는 공간적 의미뿐 아니라, 루돌프 오토가 말한 누멘(Numen, 신의 위엄을 느끼는 종교 체험)적 요소하 현현(顯現)한 실체로서 마치 잃어버린 신화시대의 거인이 다시 나타난 것만 같게도 느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지체로 하여 만들어진 이 신비체는 과연 거인이다.

하지만 정통과 이단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기준의 칼은 또 얼마나 무뎠기에 성녀 잔 다르크와 사보나롤라까지 화형에 처했던 것인가. 영성의 대가 에크하르트나 예수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조차 그 칼날을 피하지 못하는 등 이단의 바다를 가까스로 건너와 천국에 이른 성인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복음적 가난의 삶을 살았던 피에르 발도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어찌하여 이단과 정통의 갈림길에서 갈라섰으며, 그것이 교도권에 대한 순명 여부 때문이라면 그 경계란 또 얼마나 모호한가. 무엇보다 2000년 교회사에서 대부분의 정통과 이단에 대한 교도권의 판단이 신의 이름을 내세운 권력의 손길에 휘둘린 것은 아니었던가.

교도권, 권력의 수단 아닌 사목 본래의 의미 되찾아야

이젠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교회에 향한 모든 몸짓들을 오히려 교회가 성장통으로 여기는 성숙의 지경으로 나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로도 새로운 몸짓이 나타날 때마다 그 몸짓도 상처 입지만, 동시에 교회라는 흰개미탑 역시 상처 입는데, 그것이 요철(凹凸)의 교합과 같이 교회에 변화를 가져다 준다. 모든 거룩함이란 가시를 지니고 있어 둘레에 자극을 주고 상처를 남긴다. 거룩함과 성인을 만나면 가시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오고 불편한 이유다. 하지만 그 아픔이 굳어 가던 몸을 살리고 심장에 피를 돌게 한다. 교회의 변화 곧 쇄신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 흰개미탑이 높아가는 것이 개미들의 쉼 없는 쌓음으로 되듯, 교회의 영성탑 역시 새로운 몸짓들이 만들어내는 거룩함의 조각들이 보태지면서 커가는 것. 성장통은 칼에 꿰찔려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주지만 교회라는 나무는 그렇게 상처투성이로 자라온 것이다.

그럴지라도 교도권이 보다 성숙하고 겸손한 자세를 놓쳐 저질렀던, 지금에 와 세상 향해 용서를 간청하는 지난 2000년 교회사 속의 갖가지 사례들이 클로즈업되면 가슴 아프다. 교도권, 교회 곳곳에 그토록 철저하고 많은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고도 왜 수많은 갈라섬이 있어 왔던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정통수호라는 미명 아래에 저질러진 패권 싸움만 같았던 숱한 이단논쟁들, 교도권이 지닌 사목 본래의 의미는 잊어버리고 권력의 수단인 양 교도권을 휘두르는 미숙한 행태들, 참으로 모든 것에 자비롭고 온전히 열려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과 고결한 인격에 부끄러울 지경 아니었던가.

자비의 희년에 교회의 자비심이 활짝 열리기를

이제 교회가 예수의 마음으로 거룩해져야 한다. 자비심으로 한없이 깊어져야 한다. 성화(聖化)는 심화(深化), 깊어짐이 거룩하게 되는 길. 교회쇄신도 거룩해짐으로써, 복음적 영성 그 깊음과 높음과 넓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해지리라. 그분의 이르심대로 더욱 깊은 데로 저어나가 그물을 내려야 세상을 구원에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 교회는 자비로운 예수의 마음을 필요로 한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자비로움,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그 바람이 시대의 징표 안에서 온전히 살아 숨 쉬게 품어 주는 모성으로 교회의 미래를 예언적으로 담보해야 한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언자 전통 그 열정은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루카 13,34) 세상의 아픔을 품으려는 모성의 애타는 마음이 그 바탕이었다. 교회가 그런 예언적 기능을 상실할 때, 교회가 민중적 심성과 교감하지 못할 때, 교회에는 치명적인 결과가 온다.

잃어버린 교회의 정신과 영혼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다시 마음이다. 예수의 그 마음, 가엾은 죄인과 장애인을 향해 시도 때도 없이 즉시 열리셨던 측은지심의 그 마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마음, 그 마음을 교회가 지녀야 한다. 똑똑한 머리가 아니라 착한 마음이다. 스승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 아픔의 이 세상을 온전히 껴안아 줄 때 상처 입은 그만큼 교회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자비의 특별희년이 곧 시작된다. 희년이 되면 로마 4대 대성전의 문들이 차례로 열린다. ‘하느님의 자비로 들어가는 문’을 상징하는 ‘성년 문’은 희년이 시작되는 12월 8일부터 성 베드로 대성전을 필두로, 라테라노 대성전, 성모 대성전, 성 바오로 대성전 순으로 차례로 열릴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교회의 자비로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야 비로소 희년도 실제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이 프란치스코 교황만의 것이 아니라면 한국 교회에서도 그런 자비의 몸짓들이 곳곳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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