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그릇이다 - 조대환]

일단 여러분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만한 실험을 하나 이야기해 보자. 1960년대에 진행되었던 실험이다. 쥐를 우리에 한 마리 넣고, 그 안에 두 개의 물통을 준비한다. 하나의 물통엔 평범한 물이 들어있고, 또 하나의 물통에는 모르핀을 탄 물을 넣는다. 우리가 마약성분으로 생각하는 그 모르핀이 맞다. 이 경우 쥐들은 그냥 물 보다, 모르핀이 들어있는 물을 더 많이 마신다. 이 실험은, “마약은 중독성이 있으니 위험하며, 나쁜 것이다.”라는 이야기의 근거로 종종 사용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엔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이런 실험에 사용되는 쥐는 성장환경이 비슷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쥐들은 실험할 때 주어진 조건에 서로 다르게 반응할 테니까. 그래서 쥐들은 태어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차갑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좁디 좁은 독방으로 옮겨져 혼자 자랐다. 사람으로 치면 책상 밑 정도 넓이의 공간에 갇혀서, 거의 평생을 지낸 셈이다.

▲ 심리 실험을 위해 동일한 조건에서 키워지는 쥐들.(사진 출처 = http://www.brucekalexander.com)

실험이 시작되면 쥐는 더 혹독한 환경으로 옮겨진다. 실험의 정확성을 위해 엄격하게 환경을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쥐는 혼자 있게 되고, 그 외의 조건은 모두 제거된다. 위에서 말한 실험의 경우, 두 개의 물통 외에 쥐가 듣거나, 보거나,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빛 역시 차단된다. 이런 부분은 사람들의 입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는다.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브루스 알렉산더 교수는, 조금 다른 내용의 실험을 진행하여 그 결과를 1981년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해당 논문은 이 링크에서확인할 수 있다. 실제 실험 과정엔 변인들의 통제를 위한 부분들이 들어 있기에, 아래에 쓰인 내용보다 약간 복잡하다.)

먼저 태어난 지 한 달이 안 된 어린 쥐들을 다수 준비한다. 그중 절반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평범한” 좁은 독방으로 옮겨 기른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독방보다 200배 넓은 공간에, 불안하면 숨을 수 있는 빈 깡통과, 오르내리며 놀 수 있는 상자를 넣어 훨씬 쾌적한 공간에 “한꺼번에” 넣어 기른다.

요컨대, 불행한 환경에서 외롭게 자란 쥐들과, 비교적 쾌적한 환경에서 외롭지 않게 자란 쥐들이 생긴 셈이다.

그리고 이 쥐들에게 모르핀이 든 물과 그냥 물을 주고 24시간 관찰해 본다.

불행하고 외로운 환경에서 자란 쥐들은 보통의 물 보다 모르핀이 든 물을 많이 마시며 우리가 생각하는 “중독”에 빠진 모습을 보여 줬다.

하지만, 쾌적한 환경에서 자란 쥐들이 보여 준 결과는 크게 달랐다. 이 쥐들 역시 모르핀이 든 물을 마시긴 했지만, 그 양은 매우 적어서 우연히 맛보는 수준에 불과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섭취한 모르핀의 양은 극히 적은 양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

마약이라는 것은 한 번 맛보면 즉시 높은 확률로 중독되고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런데 어째서 어떤 쥐들은 모르핀이 든 물을 마셨는데도 중독되지 않는 것인가?

알렉산더 교수는 2010년에 쓴 “중독: 쥐 공원의 관점에서”란 글에서 위의 내용에 인간의 사례를 덧붙였다. (원문은 이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영국은 18-19세기, 신대륙에 식민지를 만들면서, 원주민들이 살던 풍족한 땅을 빼앗고, 그들을 척박한 지역들에 강제로 흩어 놓았다. 이에 더해, 다른 제국주의 국가처럼 영국 역시 원주민들에 대한 문화적 말살 정책을 시행했다.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원주민들의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 영국식 언어와 문화를 교육시키고, 교육이 끝나면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식이었다. 아이들이 부모들의 사회에 돌아왔을 때, 아이들과 어른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고,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이런 정책들은 당시 원주민들의 경제와 사회를 파괴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현상 중 하나가 대규모 알코올 중독 현상이었다.

이에, 당시 영국 정부가 내놓은 대처 방안은, 마치 지금의 한국을 연상시킨다.

“인디언들은 유전적으로 열등해서, 술을 절제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인디언들에겐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한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이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술을 구하기 힘들어졌음에도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알코올 중독 증상들이 계속 심해져 갔고, 이런 중독 증상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마약 중독, 도박 중독 등 다른 중독 증상들로 변화해 갔다.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이 오기 전에도 술을 만들 줄 알았고, 술을 마셔 왔었다. 만약 이들이 진짜로 술을 절제할 줄 몰랐다면, 영국인들이 오기 전에 이미 사회가 파탄나 있었어야 했다. 그 외에도, 부족 간의 전쟁이나 대규모 전염병 같은 크고 작은 문제들이 원주민들에겐 있엇지만, 이런 집단적 중독 증상은 원주민들의 역사에 없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상황의 원인은 술인가, 아니면 영국이 행한 식민지 정책인가?
나는 지난 글에서, 문제의 본질은 스마트폰도 게임도 TV도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위 실험들과 역사적 사실들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행복하게 자란 쥐들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만일 중독이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탐닉”이라고 한다면, 행복하게 자란 쥐들의 이야기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독을 “자신을 괴롭게 하는 대처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특정 수단을 통해 도피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이야기는 비교적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도피해야 하는 대상이 없으면, 중독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야기해 보자. 아이들이 정말로 스마트폰이나 게임에 중독이 되어 있다고 해 보자. 그러니까, 아이들에겐 지금 “아이들이 대처할 수 없는, 아이들을 괴롭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 괴로움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스마트폰 게임”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다. 스마트폰을 금지시키든 게임을 금지시키든, 아이들에게서 영구적으로 그 괴로움을 잊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을 빼앗는다고 해 보자. 그 뒤 아이들은 자신들이 대처할 수 없는, 자신들을 괴롭게 만드는 그것을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게 될까?

1960년대에 진행된 실제 실험 중엔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그 실험엔 물통이 없었다. 대신 쥐의 목 부분에 있는 혈관에 직접 꽂혀있는 튜브가 있을 뿐이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고 햇빛도 볼 수 없는 밀폐된 상자 안에는, 오직 튜브를 작동시키는 스위치 하나만이 존재했다. 쥐가 스위치를 누르면, 쥐의 혈관에 꽂혀있는 튜브를 통해 각종 약물 – 헤로인, 모르핀, 암페타민, 코카인 등 – 이 주입되었다. 쥐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였다. 스위치를 누르거나, 스위치를 누르지 않거나. 난 이 내용을 읽으면서 한국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앞서 쓴 글에서 이야기한, 아침에 등교해서 새벽 4시에 집에 들어오는 아이들 말이다. 이 아이들에게 스위치와 꽂혀있는 바늘을 없애면 문제가 해결될까? 한국은 이미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이며, 한국의 청소년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아이들이 왜 스마트폰 게임에 중독될까?

애초에 이게 중독인지 아닌지부터 다시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만약 집단적 중독 상황이 맞다면, 그 원인부터 찾아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다. 아이들이 어쩌지 못하는 그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중독의 대상은 다른 무언가로 바뀌기만 할 뿐, 중독 자체는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에 대한 파악 없이, 단지 괴로움으로부터 빠져나갈 수단만을 없앤다면, 그것은 학대다. 사람들이 말하는 게임중독이 만약 중독이 아니라면, 게임에 중독이라는 단어를 붙여 아이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켜 가는 현 상황 자체가 아이들이 괴로워하고, 무언가에 중독되게 만들 원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폭력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내 눈에는 공통적인 현상이 하나 보인다. 바로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아이들을 그저 공부만 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그 시선 말이다. 아이들이 새벽 4시에 학원에서 귀가하는 마당에, 아이들의 수면권을 지키겠답시고 셧다운제를 실시하겠다는 그 모순적 태도에서 비인간성을 느끼는 건 나 뿐인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를 만들어 놓고, 새로운 것들은 자신들만 즐기겠다는, 혹은 자신들이 즐길 수 없으니까, 혹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기 귀찮으니 너희들은 즐기지 말라는 식의 권력에 기반한 모습에서, 비인간성을 느끼는 것은 나뿐인가? 어째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고통에는 이렇게나 둔감하면서, 아이들의 잠재적 생산성엔 이렇게나 민감한가? 내가 나의 삶에 대한 독립적인 선택권을 가지게 된 지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내가 어릴 때 괴로워했던 어른들의 아이들에 대한 폭력적인 모습들은 아직도 여전하다.

지난 기사에 실렸던 아래의 사진을 보자. (해당 사진은 나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실렸다. 아마도 편집부 담당자 분께서 무척 바쁘신 와중에 넣으신 것 같지만, 덕분에 적절한 예시로 쓸 수 있었다.)

▲ 인터넷 게임에 몰두한 청소년. ⓒ지금여기 자료사진

이 사진에 아이에 대한 관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마우스와 노트북이라는 낯선 대상에 대한 의도된 적대감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모조리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이 사진에서 아이는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적대감을 표시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사진 출처 = http://www.brucekalexander.com


이 사진은 맨 위의 사진에 나온 우리 안에 있는 쥐의 사진이다. 차라리 이 사진이, 지금 아이들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배제 당한 채로, 의도된 가치만을 위해 사는 생명. 무엇을 주든 간에, 이 쥐는 평범하게 살아온 다른 쥐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언가에 “중독”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그것이 무언가의 결과라면 더더욱. 이런 쉬운 방법으로 문제의 결과를 원인인 양 왜곡하고, 문제의 원인을 외면해 버리는 것에 “중독”되어 버린 우리 어른들이야말로, 아이들이 세계에 “좌절”하고 스마트폰 게임에 “중독”되게 만들고 있는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앞서 쓴 글에서 나는, 스마트폰 게임의 인기도 언젠가는 잊혀지고,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메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가 오면, 어른들은 그 무언가에게 또 다시 중독이란 단어를 붙이며 문제를 회피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반복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조대환(도미니코)
넥슨 GT 수석 게임 디자이너. “제라”, “카운터-스트라이크 온라인”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서든 어택”에서 일하는 행운을 누렸다. 게임이란 매체를 통해 세상의 여러 면을 공론화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