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겨울비가 며칠째 계속되어 을씨년스럽게 추울 때, 한국에서 조계종 스님들이 방문했다. 문경 봉암사에 국제 선센터 건립을 준비하면서 유럽의 선원과 수도원을 돌아보는 길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벤치마킹을 위해 떼제를 찾은 것이다. 스님 일곱 분을 포함해서 일행은 모두 열 명. 그 가운데는 조경학자도 있었다.

해도 짧은 겨울날 오후라, 짐만 풀어 놓고 떼제의 이곳 저곳을 함께 둘러보았다. 새로 짓거나 수리 중인 손님 숙소를 안내하면서 “이런 것이 과연 참고가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분들은 바닥과 벽, 지붕, 단열재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천 년이 된 떼제의 마을 성당에서 일행은 가장 큰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최소한의 조명만 있는 이 기도의 집에 들어가 잠시 앉았다가 나오자 “우리 선방도 이렇게 좀 어두워야 해요. 빛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집중이 어렵고 정신이 흩어진다니까요.”라고 말하는 스님도 있었다.

이 불자들은 여기 오기 직전 리옹 근처의 라투레트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 수도원은 유명한 현대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이다. 나는 한 번도 가 볼 기회가 없었지만 한국의 개신교 목회자들과 교우들에게서 그곳 얘기를 들었다. 사실 그런 건축가가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지은 수도원과 떼제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스님들과의 대화 시간에 조경학자는 “보통 서양 수도원의 건물 배치에는 대개 상징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데, 떼제는 어떤 원칙을 가지고 건물들을 짓고 배치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서 또 형편되는 대로 지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단순함이겠지요.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박함 말입니다.” 원장 수사의 대답이다. 우리는 건물을 지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점점 많은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에 조금씩 계속 지은 것이다. 또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객관적 제약이 있었다.

▲ 떼제의 마을 성당 안. ⓒ신한열

“묵상은 어떻게 하십니까?”

비록 건축을 계기로 떼제를 찾았고 머무는 시간도 짧았지만, 한국에서 온 선승들과 우리 수사들이 교류하는 시간을 빼놓을 수 없었다. 철관음 차를 끓여서 다과와 함께 내놓았다. 원장을 비롯한 십여 명의 수사가 모였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자들과 교류가 많지 않은 스님들이라 “신부님과 수사님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라는 질문도 있었고 “우리는 참선할 때 화두를 붙들고 정진하는데, 수사님들은 묵상을 어떻게 하십니까?” 하고 묻는 분도 있었다.

알로이스 원장 수사는 한국에 갔을 때 해인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스님들과 대화한 경험을 얘기하면서 “불교는 우리와 너무나 다르지만 그래도 가깝게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어떤 스님은 “수사님들이 그리스도교의 수도승이라면 우리는 불교 수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저희들은 신부님들과는 가까운데 목사님들과는 그렇지 않아요. 신부님들도 오히려 목사님들보다 우리와 더 친근감을 느끼신다고들 해요.” 다른 스님이 말을 이었다.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일행 가운데 대표 격인 스님은 건립을 추진 중인 국제 선센터의 의의를 설명했다.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화해와 상생을 하지 못하는 것, 환경 파괴와, 생명 경시라고 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한국 불교의 소중한 자산인 간화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들 하십니다. 그래서 저희는 선을 더 국제화하고 대중화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농업, 의료 등 삶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고 개선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오늘날의 도전에 대해 어떤 응답과 노력을 하시는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사람들을 가르고 나누는 수많은 경계와 장벽이 있습니다. 그것을 부수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멀리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아무 사심 없이 남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저희가 가장 중요시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 ‘경청’입니다.” 원장 수사는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다’는 창설자 로제 수사의 말을 상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내면에서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을 가르는 장벽과 경계선은 우리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절 밥을 드시던 분들이 외국에서 식사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는 저녁에 밥을 하고 된장, 고추장, 식초를 버무려 쌈장을 준비했다. 지난 성탄절 한국에서 누나가 보내 준 김도 내어 놓았다. 대성공이었다. 식사하면서 한국 불교에도 출가자가 계속 줄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출가를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이든 이가 많아진다고 한다. 조계종의 경우 출가자의 나이 제한이 50살로 많이 올랐지만 그것 때문에 출가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일치 주간

스님들이 떠나고 일치 주간이 시작되었다. 떼제에서 매년 열리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한 기도회”에는 우리 지역의 가톨릭 주교와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 은퇴해서 남편과 함께 떼제 근처에 살고 있는 성공회 여성 사제, 프랑스 연합개신교회 목사, 또 복음주의 교회 목사들이 참석했다. 프랑스의 가톨릭과 전통적인 개신교회에는 신자들이 줄고 노령화가 두드러지지만 복음주의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이분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방문했고 떼제로 초대했다. 그래서 올해는 이분들도 일치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갑자기 추워지고 눈이 내린 까닭에 참가한 신자들이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이런 모임에서 보면 여러 교파의 성직자와 신자들이 서로에게 우호적이고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는 것을 의미 있게 여긴다. 그런데 참가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노년층이다. 프랑스 시골이라는 우리 지역의 특수성 때문일까? 이런 만남을 통해 친분을 다지는 것이 좋기는 한데 젊은이나 새로운 얼굴은 별로 찾을 수 없다. “어제 주일 미사에는 모두 노인들뿐이었어요. 난민 주일이라 떼제의 수사님들이 이라크와 수단 청년들을 데리고 참석했는데 젊은이라곤 그들뿐이었어요.” 한 본당 신자의 말이다.

많은 평신도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봉사하면서 노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분들 이후의 중년과 청년 세대는 아주 적다. 교회의 내일을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자들의 노령화는 프랑스 일반, 혹은 유럽 전반의 현상일 것이다. 또 한 세대가 지나고 신실한 노인들이 사라진 뒤에는 어떻게 될까?

내가 유럽에서 30년 가까이 경험하고 관찰한 바로는, 젊은 세대에게 교파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 신앙과 교회가 자기 삶에 의미와 생명, 힘과 위로와 용기를 주는지가 중요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교파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교회(=그리스도인)의 분열은 그리스도교의 신용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적대적으로 지내던 과거와 달리 서로 싸우지 않고 다정하게 지내는 것으로 충분할까?

만일 복음이 더 이상 젊은 세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이렇게 한두 세대가 더 지나서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면? 그렇게 될 때, 루터교, 개혁교회, 성공회, 가톨릭, 정교회 전통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박물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요한 23세의 말씀이 생각난다.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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