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뜬금없이 제대 위에 국기를 놓는다거나 제단 위로 국기를 게양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뜬금없다고 느낀 것은 그런 사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상태가 그렇다 보니, 긴말 필요없이 자동적으로 '그건 아니지....' 하는 내적 응답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제대에 국기를 놓은 상황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다는 것이 꼭, 제대 위에 국기를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잠시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봐도 특정한 나라의 국기를 제대에 두는 것은 어째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제대 위나 미사 제단 위에 국기를 올리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전례상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추측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신 안에서는 보편교회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세계 만방에 퍼져 있는 상태를 상상할 줄 압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은 형제자매들입니다. 단순한 국가의 범위를 초월하여 하느님 앞에 ‘소환’된 이들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이며, 지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넘쳐나게 하려는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기 때문에 특정 국가의 영역을 넘어서 있습니다.

실제로 전례적으로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한 제단에는 국기는 물론 교황기도 걸지 못한다는 것이 전례 원칙. 다만 민족과 관련된 특별한 기념미사 때나 특별한 지향을 둔 야외미사 때 독서대 전면이나 제대 아래 왼쪽에 국기를 게양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 전례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다. 정의철(가톨릭대 신학부총장 겸 신학대학장, 전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신부는 "전례적으로는 제단 위에 태극기를 둘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라면서도 "특별한 기념미사때 제단을 제외한 성당 안에 태극기를 둬도 되지만, 조심할 것은 전례적 의미를 잃고 주객이 전도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같은 전례적 측면만 주의한다면, 창조, 발전, 자유, 평등, 무궁이라는 다섯 가지 의미를 함축한 태극기를 성당에 거는 일이 교회 전례와 크게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한국 천주교회와 태극기에 얽힌 사연”, 2003년 8월 10일 평화신문 기사 참조)

▲ 광복절이자 성모승천 대축일에 명동 성당은 제대 양쪽에 태극기를 걸었다. ⓒ왕기리 기자

그러고 보니, 제가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도 입학, 개강, 졸업식을 위한 기념미사에서는 교기와 태극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단 위에 올라온 경우는 없습니다. 미사가 성당에서 진행되지 않고 학교 체육관 무대를 이용하여 진행될 때 국기가 깃대에 끼워져 무대 위에 위치한 경우가 있었다 해도 무대 중심부에 위치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미사와 입학식이라는 행사가 절충된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된 예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례학 교수이신 선배 신부님은 아주 간단하게 원칙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대는 물론 제단에는 십자가와 감실, 성체성사를 방해하는 어떤 것도 놓아서는 안된다." 여기서 "방해"라는 말은 단순히 가리는 것만이 아니라 회중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세상 어느 곳에나 하느님의 자비가 넘쳐나는 상태를 상상하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국가들끼리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힘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에 대해 힘겨운 부담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위협하는 현실을 볼 때는 낙담하게 되고 종종 분노하게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같은 신앙인들끼리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힘을 모으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기를 바라보며 한 국가가 지닌 이상에 마음을 모으고 국민적 일치를 지향하는 노력은 나름대로 의미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여 사람들이 국기라는 이미지 안에 갇혀 사고를 획일화하고 다양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은 하느님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해 보려는 그리스도교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는 폭력에 저항하며, 다양성을 가지면서도 성령을 통해 일치를 경험하는 이들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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