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식 신부 인터뷰

“어떤 이는 성당을 초라하고 작게 지어야 한다고 한다. 성당이 화려하면 어려운 이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이 모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성당을 화려하고 크게 지어 하느님 품에 안긴 것처럼 느껴야 사람들이 온다고 말한다. 이것이 현재 교회의 딜레마가 아닐까.”

한 원로사제가 보는 현재 교회의 고민이다. 최기식 신부는 “성직자가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에는 예민하지만, 수단자락이 흙탕물에 젖도록 어려운 이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어 주지 않는다면 타인이 아닌 교회(자신)만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그의 자기성찰 고백. “그러나 내 행동은 생각대로 되지 못한다. 신부가 될 때 나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고,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는 것처럼 죽고 썩는 곳에서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사제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늘 마음 안에 움직이면서도 겉으로는 편한 것을 좋아했다.”

1971년 원주교구 사제가 되고, 1982년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김현장을 숨겨준 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최기식 신부. 감옥에서 나오고 1984년 사회사목국을 맡은 뒤부터 30년 넘게 사회복지에 헌신한다.

현대 한국교회와 역사를 함께한 원로사제가 자신의 삶과 더불어 교회를 돌아보며 느낀 것은 지금 교회가 맞닥뜨린 현실과 다르지 않다. 성직자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교회쇄신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지만 딱히 교회가 변하는 것 같진 않다.

최 신부는 제도교회 안에 머물러서 쇄신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신자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종교일지라도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명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즉, 교회의 역할이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할 때 교회일과 교회일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는 문을 깨고 나가야 하며, 어떤 부분을 깨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 최기식 신부. ⓒ지금여기 자료사진

국제협력단체인 ‘한국희망재단’의 이사장인 그는 얼마 전 4번째로 아프리카를 찾았다. 한국희망재단은 현지에 있는 NGO단체와 협력해 주민들이 자립하도록 돕고 있다.

그가 이번에 방문한 브룬디에서는 현지 비영리 단체인 IPSDI BURUNDI와 연계해 주민들이 협동농사로 자립하도록 땅을 사서 지원했다. 그들 스스로 땅을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하는 자리. 괭이로 밭을 일구겠다는 말를 듣다가 최 신부는 크레인을 쓰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무자들은 그를 가로막았다.

5년, 10년이 걸려도 주민들의 방법을 따라가며 그들이 주체가 돼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주민들이 먼저 크레인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지원하지만, 먼저 해결책을 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 신부는 스스로에게 발견한 사고의 한계가 교회의 그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많은 교회기관이 어려운 곳을 도우며 교회의 역할을 다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가서 사람들이 일을 하게 해야 해, 내가 우물을 파야 해, 내가 기계를 들여서 밭을 갈아 줘야 해”가 지금까지 교회의 방식이라고 했다. 그는 이것이 나쁘지 않지만 이 한계를 벗어나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는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것만이 교회 일이 아니라며 어느 단체, 누구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어려운 이를 위해 일한다면 그들을 보호하고 원동력이 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화, 정의, 남북통일 등 공동선을 위한 일도 마찬가지다.

정의구현사제단에 제도교회가 선을 긋는 것도 최 신부는 안타까워했다. 그가 감옥에 갔던 시절에는 누구나 그를 동정하고 같은 편이었지만, 시대가 달라져 지금은 사제단에 칭찬과 비난이 갈린다.

최 신부는 이렇게 입장이 다를 때일수록 사제단만 떼어서 정의를 위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단편적으로 보면 안 된다고 이르면서도, 세월호참사, 강정 등에서 몸을 던져 이들과 함께하고 대책을 찾도록 원동력 역할을 하는 것을 교회일이 아니라고 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사제단은 우리 사회의 빛이며, 시간이 지나면 역사 속에서 더욱 그 빛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 8월 초 아프리카 부룬디를 찾은 최기식 신부. (사진 제공 = 한국희망재단)

그는 사제단에 미안하다. 1970년대에는 열심히 했지만 사회복지를 맡으면서 이전만큼 활동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짐이 있다. 그는 그러나 사회복지를 하면서도 늘 마음은 사제단과 같이 했다고 했다.

사제단이 생긴 계기였던 지학순 주교를 기리는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 신부는 단체의 활성화 방안을 두고 요즘 걱정이 많다.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은 매년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상을 준다. 내년에 20주년을 앞두고 있지만, 그는 “정의평화 소리만 나오면 돈 내던 사람도 다 끊어 버린다”고 했다. 이미 20년 전부터 이전엔 혁신적이었던 이들도 ‘정의’라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는 지학순 주교를 기리는 일에 교회의 정신을 지니고 정의와 민주화를 위해 애쓰는 이들이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30년간 그의 손을 거친 단체는 이 외에도 한살림, 도마회, 사회복지협의회 등 많다. 사회복지를 소명으로 여기느냐고 묻자, 그는 “부르심을 받아서 했다? 글쎄.... 모르겠다. 그냥 주어진 대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다”고 답했다. 은퇴하고 일흔이 넘어도 30시간의 비행에도 끄덕없이 아프리카를 오가며 주어진 일을 한다. 그에게 건강관리법을 물었다. “아침저녁으로 20분간 보건체조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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