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8월 28일(연중 제22주일) 루카 14,1.7-14

오늘 복음 이야기는 먹는 이야기다.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서 예수는 음식을 먹는다. 사람들은 예수를 지켜보고 있고, 예수의 시선은 음식상 윗자리의 사람들에게 쏠려 있다.

문제는 예수 당시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의 가치다. 예수 시대 식사에 초대받았다는 건, 일정 부분 사회적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식사는 집주인이 초대된 사람을 신분과 지위 순에 따라 소개하고, 마을의 주된 이슈를 나누며, 초대된 사람들 중 귀빈의 의견을 듣는 것으로 진행된다. 식사가 벌어지는 집 근처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식자 자리와 바깥 자리는 사회적 인정의 차이고 구별이었다. 식사에 초대받은 귀빈들은 마을의 종교적 지도자, 예컨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올바른 가르침과 현실의 지혜로운 판단을 민중들에게 제시했고, 유대 사회의 민중들은 그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에서 자주 보듯이, 예수는 그들을 비판했다. 이유인즉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시대의 체제 안에 적당히 머물면서 체제가 가져오는 불합리와 모순에는 철저하게 눈을 감은 탓이다. 굳이 오늘날 한국 사회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자면, 강준만 교수가 표현한 바 있는 ‘강남좌파’ 정도가 예수 시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일 테다. 실질적 부를 누리면서, 그리고 사회 체제가 제공하는 어느 정도의 기득권을 누리면서 정의를 외치고, 시대를 비판할 줄 아는 ‘상징 자본’까지 움켜쥐려는 이들이 강남좌파다.

예수 시대의 식사는 사회적 계급의 재확인이고, 그로 인한 제 신분에 대한 우월감 혹은 열등감이 교차하는 갈등의 장이었을 것이고, 그 식사를 바라보는 민중들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계급의 차별을 느꼈을 것이다.

▲ 강남 거리.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예수는 자신이 머물렀던 당연한 현실의 사회적 프레임 안에 끼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프레임을 끄집어낸다. 예수는 끝자리에 앉기를 요구한다. 또한 예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말을 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기 낮춤, 겸손, 혹은 자비로운 마음 등을 가지라는 권유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역시 ‘내가 부유하니 가난한 이들을 챙겨야겠다’는 일종의 계급의식이 전제된 생각이고, ‘좋은 생각’, ‘착한 생각’이나 계급이 구분되어 차별적 요소가 있는 사회적 프레임을 넘어서지 못하는, 아니 넘어서길 싫어하는 ‘강남좌파’식 사고방식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가 가난하고 장애가 있고, 다리를 절며 눈이 먼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초대한 사람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말하자면, 경제적 계급, 주고받는 가운데 형성되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예수는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루카 복음의 행복론은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행복과 다르다. 루카 복음은 보다 물질적 행복을 말하는 동시에, 부자에 대한 불행 역시 언급하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대비를 뚜렷이 드러낸다.

우리가 진정 행복한 것은 하늘 나라를 얻는 것이다. 이사야서 29장 19-20절엔 이런 말이 있다.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겸손한 이들을 가리키는 히브리 말은 아나윔이다. 원래 가난한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그 뜻대로 살다보니 세상에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세상이 자신의 자리와 이익을 좇아 살아갈 때, 아나윔들은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았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온갖 은혜를 베푸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가난한 이들이 되어야 행복하다. 사회 체제 안에 부자가 되려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그것이 제 삶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가꾸어 나가는 데 중요한 것이라, 혹은 필요한 것이라 여기는 태도는 오늘 바리사이 집에 모인 ‘강남좌파’들의 지극히 당연하고 현실적인 모습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예수님이 바라시는 모습은 아니다. 우린 그리스도인들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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