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다양한 일들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사람의 영혼이 지닌 세 가지 능력(관능 官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사연을 보내왔습니다.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리를 잡아 갈 때 도입된 한자 교리용어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사용했던 용어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교리용어와도 만나게 됩니다. 중국으로부터 천주학 관련 서적을 수입해서 신앙을 키웠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용어들은 요즘 우리가 자주 쓰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꿔서 사용되기에, 옛 용어를 그대로 쓰면 좀 전문용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잘 쓰지 않을 뿐 사라진 말은 아니며 아직도 사용하는 신자분들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친구도 궁금해졌겠죠.

"가톨릭대사전"을 찾아보면, 인간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을 '삼사'(三司)라고 하며, 그것은 영혼의 세 가지 '관능'(官能)을 가리키는 말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전에서 관능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을 의미합니다.) 천주교 교리에서는 그 세 가지 관능을 '명오'(明悟), '기함'(記含), '애욕'(愛慾)이라 불러온 것입니다. 삼사에 덧붙여, 사람의 '오각'(五覺)을 일으키는 감각기관을 '오관'(五官)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입니다. 촉각 대신 그것을 '마음'으로 보기도 합니다. 삼사와 오관을 합해서 '삼사오관'이라고 마치 사자성어처럼 불러 왔습니다.(가톨릭대사전, '삼사오관' 항 참조)

명오, 기함, 애욕.... 익숙치 않은 용어들입니다. 조금 익숙한 용어로 바꿔 본다면, 명오는 지성, 기함은 기억(력)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욕'에 좀 당황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듯합니다. 이건 뭘까요? 사랑을 향한 욕망? 애정 욕구? 사랑받고 싶은 욕구? 여러가지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다.

"한불자전"(1880년 발간)을 참고하면, '삼사오관'이 영혼의 세 가지 작용과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칭하는 천주교 용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나옵니다. 1.기억(memoire), 2.지혜(intelligence), 3.사랑(amour)입니다. 앞서 언급한 한자 교리용어를 대응시켜 보면, 기억이 기함과 연결되며, 지혜는 명오와, 그리고 사랑이 애욕과 대응합니다.(가톨릭대사전, 앞의 항 참조) 애욕을 괜히 이상한 의미로 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정리해 보면, 명오라는 용어를 지성이나 지혜로, 기함이란 말을 기억(력), 애욕을 사랑으로 대치하여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사랑을 '의지'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영혼이 지닌 세 가지 능력인 명오, 기함, 애욕은 지혜, 기억,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그런데 삼사오관이란 것이 무슨 맥락에서 필요한 것일까요? 정작 그 용어를 우리와 익숙한 것으로 바꿔 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말입니다. 천주교 용어이며 영혼의 능력, 육체의 능력, 그 감각이 우리에게 주어진 까닭을 잠시 눈을 감고 물어보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지적이고 감성적이며 감각적인 모든 능력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결국 그 무슨 일보다도 인간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고 실감할 수 있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알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능력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기도 안에 오감을 동원해서 몰입해 보도록 권합니다. 기도 속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구워 주시는 물고기의 냄새와 장작불 냄새와 소리, 주님과 함께 나눠 마시는 포도주의 향과 맛, 따뜻한 빵 조각. 예수님의 손길과 그 체온.... 기도는 살아 있는 무엇이 됩니다.

장면을 상상해 가며 하는 이런 기도가 더 깊이 있는 깨달음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역사적이며 문화적 지식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능력이 지성(혹은 지혜)입니다. 기억은 우리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계속 기억하는 것과 관계 있는 능력입니다. 더불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모든 것들을 잘 기억하도록 해 줍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향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기도하기 싫을 때도 '의지'를 발휘하여 기도하기도 합니다. 주일미사 가는데 괜시리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도 이 의지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어찌하여 '의지'와 통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한 형제가 기도 중에 주님이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를 굽기 위해 지피신 장작불 향을 맡을 정도로 기도에 몰입했던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음 가득한 부러움과 궁금함을 느끼며 그 형제에게, 기도 안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해 달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기도 중에 겪은 생생한 사연을 나눠 먹으려 했던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의 대답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경당 스피커가 합선으로 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에 화재가 날 뻔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이런 흔치 않은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감을 동원한 기도가 화재예방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 형제의 체험담이었습니다.

데오 그라시아스!(하느님 고맙습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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