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구영주] "관상기도와 활동의 통합", 김준년, 바오로딸, 2013

기도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 "관상기도와 활동의 통합", 김준년, 바오로딸, 2013. (표지 제공 = 바오로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외적 활동이 내적 삶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적 삶은 쉽게 드러나지 않으며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평가절하 되고 있는 시대이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오히려 내적 삶의 풍요로움이 외적 활동을 더욱 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 기도하는 자로서 맛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경험케 하는 관상기도와 활동에 대한 교회박사이자 성녀이신 데레사의 고백을 들어 보자. 이 책은 수도자나 성직자들에게 더 적합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나, 삶 속에서 기도와 활동의 통합을 고민하고 내적 삶과 외적 활동의 균형을 찾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한 번쯤은 생각해 봄 직한 이야기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예수의 데레사 성녀 탄생(1515년 3월 8일) 500주년을 맞기 두 해 전에 발간된 의미 있는 책이다.

교회박사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515년 3월 28일 수요일, 스페인의 베키아 카스티야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데레사 성녀의 생애는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1515년에서 1535년으로, 가정생활을 한 시기다. 두 번째는 1535년에서 1562년으로, 육화의 가르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한 시기이며, 세 번째는 1562년에서 1582년으로 개혁 가르멜을 설립한 시기다. 데레사 성녀의 삶을 따라가 보면, 그녀의 생애가 기도 여정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어린 데레사는 순교에 열망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순전히 사랑과 희생의 마음이 아닌, 당시 영웅들의 업적을 흉내 내어 구원이라는 행복을 얻으려는 마음이었다. 순교를 갈망하는 소녀의 생각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애적 성격이 더 강했던 것이다. 첫 번째 신앙의 길의 지향은 좋은 것이었지만 동기는 좀 더 성숙되고 정화될 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 갈망은 이웃에 대한 봉사였다.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어린 순교자의 순간적 이탈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또 한 번 다른 이탈로 바뀐다. 문제는 이웃에 대한 봉사가 깊은 숙고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555년 초 데레사는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삶, 곧 관상적이며 내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써 덕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을 기도의 여러 단계나 상태와 연관 지어 언급하는데 곧 거둠의 기도, 고요의 기도, 일치의 기도 같은 이름으로 기도를 설명한다. 여러 단계의 신비기도는 서로 구별되지만 하나의 사슬을 이루며 각각의 고리는 끊임없이 발전해 간다. 이는 관상적 영혼이 거쳐 가야 하는 길, 곧 기도의 여러 단계를 말한다.

데레사 성녀에게는 기도와 관상, 신앙과 삶 사이에 괴리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것이 삶으로 나타나야 된다. 따라서 기도는 하느님과 통교하는 사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어쩌다 하는 사건이 아니다. 기도는 삶의 변두리에 있거나 잠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과 결합하고 확장되는 존재론적 구조로 되어 있다. 데레사가 말하는 기도의 특징적 개념은 하느님과 생생한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서 통교와 애덕, 우정을 나누는 가운데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점점 고양된 단계의 기도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점점 깊이 체험한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깊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하느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영혼이 인도되는 방은 영혼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영혼의 중심과 신적 중심의 깊은 평화 속에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참된 기도만이 참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기도는 단순히 활동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기도 자체가 가장 효력 있는 활동이다.

▲ '성 아빌라의 데레사', 호세 데 리베라.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관상과 사도직 활동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데레사 성녀의 영적 삶에서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찾아 보아야 한다. 성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데레사 영성의 핵이며 특성이다. 데레사의 내적 삶의 구조는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핵을 맴돌고 있다.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실존 안에 모셨고 그 다음 그분의 육화된 사랑의 신비 속으로 관통했다. 그리고 조금씩 그분의 신적 위격과 더욱 친밀하게 동화되어 갔다. 그녀는 전 생애에 걸쳐 그리스도와의 긴 동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묵상기도에서 시작하여 신비적 관상의 높은 영역으로 들어 높여진다. 이런 여정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님의 생애를 따르는 길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깊이 결합된 데레사 성녀에게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것은 곧 교회를 관상하는 것이고 교회를 관상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데레사 성녀는 교회 안에서의 활동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성녀가 비록 그리스도에 대한 관상에서 교회 안에서의 활동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데레사에게 있어서 교회 안에서의 활동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데레사는 교회 안에서 겪는 모든 수난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는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다.(콜로 1,24 참조)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을 복된 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관상의 개념과 데레사에게 있어서 관상의 의미를 알아보았다면 다음은 활동에 대한 이야기다. 활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활동을 진리의 단순한 고찰과 인식의 기쁨 안에 머무르는 관상과 대치되는 것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이 물음에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다. 곧 ‘활동’이란 무엇을 하도록 질서 지어 주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활동이 참된 활동이라는 광의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것과 같다. 행위를 하는 것과 활동을 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참된 활동은 인간의 영적 변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먼저 내향성과 외향성의 이중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활동의 의미를 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밭일을 하거나 물을 긷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인간의 영적 변모의 직접적 원리가 아니라 추이적 활동이다. 반면에 덕을 습득한다거나 인식하는 행위는 참된 인간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 활동 조건은 우리의 인격을 고양시키고 덕을 자라게 하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증진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바람직한 활동을 하기 위해 우선 하느님과 내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역사에서 활동하시듯 우리도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함을 말한다. 참된 활동은 우선 하느님과의 합일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시켜야 한다. 이런 윤리적이고 덕스러운 활동은 그 자체에 머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관상과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활동적 삶은 관상적 삶을 준비하는 것으로서 활동적 삶이 마치 관상적 삶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준비하는 삶이 없다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관상의 길에 들어서려면 덕을 증진하는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 일하고 있는 수녀. (이미지 출처 = Max Pixel)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되며 그것은 바깥 대상들과 관계를 갖는 외적 활동과 덕의 완성을 추구하는 내적 활동으로 구별됨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절대 면제 되지 않는 윤리적 노력은 내적 활동으로, 관상과 하느님과의 합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관상과 활동은 이토록 긴밀히 결합되어 있고 내적 활동을 통한 준비 과정을 통해 관상이라고 하는 하느님과의 더 깊은 일치점으로 나아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외적 활동만으로 덕을 실천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노력은 내적 활동으로 향해야 하는데 기도는 내적 활동을 강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인내를 얻기 위해 기도하고 죄에 대해 깊이 묵상함으로써 죄의 위험을 깨달아 죄 지을 기회를 피하게 된다. 기도는 또한 사도직 활동에 중대하게 영향을 미친다. 관상가들에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태도가 기도로 얻게 되는 평화에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궁핍한 이웃을 돌보지 않고 혼자만 기쁨을 향유하려는 것이다. 성녀는 우리에게 관상이 방해될 것을 염려하지 말고 활동하라고 조언한다. 오히려 사도직 활동이 관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도와 내적 사도직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있다. 곧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이행하는 것만 아니라 반대로 움직이기도 하기에 서로가 발전하는 것이다. 참된 사도직 생활은 기도로 향하며 참된 기도는 사도직 활동의 궁극 목표인 구원 사업에 도움이 된다. 곧 하느님의 참된 사랑은 내적 필요에 따라 이웃을 향한 저항할 수없는 사랑으로 피어나며 애덕이 강할수록 더욱 열정적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관상기도와 활동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관상생활과 사도직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 구원으로서 이 둘은 거룩함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성인들은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 안에서 이웃을 바라본다. 그들은 사랑의 이 두 가지 형태 안에서 관상과 활동을 하나로 모은다. 그러기에 성화는 관상과 활동을 하나로 묶어 주는 통합의 원리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성화는 모든 관상가와 활동가들이 나아가야 할 공동 목표다.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적 개념이며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성화되어야 한다. 모두가 성화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따라서 성화를 지향하는 사람은 관상과 활동의 선택이라는 갈등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다수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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