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과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통합적 인간발전, 그리고 세상의 변두리로 가는 교회라는 비전을 이야기하는 요즘, 그는 50년 전의 교황 바오로 6세가 영감을 준 데 대해 감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 뒤 낸 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년 3월 26일)에서 “민족들의 진보적 발전”을 “교회가 깊은 관심을 가진 목표”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 경제와 더 자비로운 세상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밝히면서 이 회칙에 담긴 것과 비슷한 언어를 써 왔다.

이 회칙이 나오면서 가톨릭교회는 세상의 가장 가난한 나라들과 연대의 뿌리를 내렸다. 바오로 6세는 경제적 불평들을 없애자고 호소하고, 자원이 한정된 이 세상에 사는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공통된 사정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전 세대의 계승자로서 동 세대 동료들의 협력으로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은 뒤에 인류 가족을 계속 융성케 할 후대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수는 없다. 전 인류의 상호 유대는 한 가지 사실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이익을 줄 뿐 아니라 또한 의무도 낳아 준다.”(17항)
 

이러한 호소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4년간 재위 내내 되풀이되어 울렸다. 그의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과 환경과 인간발전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그는 인류 가족에게 서로 돌보아야 할 사회적 책임을 일깨운다.

▲ "민족들의 발전" 회칙 표지. (이미지 출처 = NCR)
바오로 교황과 마찬가지로, 그는 지난 2월에 미국에서 열린 대중운동 세계대회 미국 지역대회에 보낸 메시지에서처럼 “돈이라는 신을 중심에 둔 경제체제” 때문에 생긴 사회적 피해를 반복해서 지적해 왔다.

50년이 지났고 정치 논의도 새로운 문제로 초점이 바뀌었지만, “민족들의 발전”의 메시지는 21세기의 한 교황 안에서 부활했고 1967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중요하다고 사회문제 전문가들은 <CNS>에 말했다.

프로비던스 대학 신학과 조교수인 다나 딜런은 “민족들의 발전과 통합적 인간발전이라는 전체 아이디어는 그 뒤의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의 초석”이라고 했다.

클리블랜드 교구의 가톨릭 공동체행동위원회의 전 사무총장인 레너드 캘러브리스는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또한 그 재위 중에 이 문서의 특정한 부분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 메시지 자체를 늘 반영했으나, 여전히 경제 불평등과 극단적 빈곤자가 있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인간발전이라는 요구를 다시금 제기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경제발전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발전, 그리고 그 발전의 이익이 사회 전체에 어떻게 확산되는가와 연관해 분배정의와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지적한다.

조지타운 대학의 드루 크리스챤센 신부(예수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바오로 6세 교황”이라고 불렀다. 그가 세상에 자비와 정의를 호소할 때 바오로 6세와 마찬가지로 성령에 의지하기 때문이란다.

"민족들의 발전" 회칙이 나온 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지 채 16달이 못 되었을 때였고, 기쁜소식을 행동으로써 나누고자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는 열렬한 평신도와 성직자들에게 양식이 되었다. 바오로 6세는 당시 교황청에 정의평화평의회를 만들기로 발표했을 뿐 아니라, 이 문서로써 오늘날의 미국 주교회의 인간발전 행동국이 1969년에 만들어지는 계기를 제공했고 여러 교구에 사회행동국이 만들어지게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분위기와 교회의 사회참여라는 공의회의 주제들에 동조하던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이 문서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빌라노바 대학의 신학, 종교학 교수인 마시모 파지올리는 지금 시점은 교회가 민족들의 발전이 교회사에서 어떤 의미인지 더 깊이 살펴봐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지난 50년간 가장 급진적인 가톨릭 사회교리였던 것을 재발견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서는 유럽 식민주의가 쇠퇴하던 시기에 지구 남반부의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북반구에서는 이 회칙은 혹평을 받았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의 편집장인 버몬트 로이스터는 이 회칙을 “마르크스주의의 재탕”이라고 했다.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이윤을 얻으려 애쓰는 자본주의에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무역이란 선진국과 이제 막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가들이 둘 다 이익을 봐야만 한다는 바오로 6세의 평가는 기존 기업관행을 너무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 바오로 6세 교황. (이미지 출처 = NCR)
종교와 자유 액턴연구소의 연구부장인 새뮤얼 그렉은 <크라이시스> 3월 3일자에서 바오로 6세가 왜 그런 문제들을 세세히 다뤘는지 살피면서, 그러한 문제들에 바오로 6세가 신중히 판단한 것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답할 간단하고 올바른 답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럼에도 그는 바오로 교황이 통합적 인간발전이라는 핵심 교회 가르침을 강조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바오로 6세는 인간발전에는 물질적 차원이 있으면서도 단순히 물질적 성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깨우쳤다." "우리가 뚜렷이 인간적인 재화를 자유로이 선택할 때 우리는 온전히 발전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정의에서부터 정치, 기업 지도자들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제들을 얘기할 때 이 진리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인간발전에 관해 (비신자들과) 특별히 다른 것이 없게 된다."

조지타운 대학의 가톨릭사회사상과 공공생활센터의 존 카 소장은 국제무역의 내용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바뀌었지만, 선진국과 후진국 대중 사이에 관계를 건설하는 중요성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바오로 교황은 경제발전이 영속하는 평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면서, “발전과 정의는 더 많이 가지느냐보다는 더 존재(being more)하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노동자로 더 잘 존재하기, 남편으로서, 어머니로서, 한 시민으로서 더 잘 존재하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회칙의 47항이 50년 전은 물론 지금에도 합당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중요한 구절이라고 지적했다. 이 항목에서 바오로 교황은 단순히 기아를 극복하고 가난을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며, 국경, 문화, 경제적 계급의 차별 없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자고 촉구했다.

이어서 바오로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다소의 너그러움만이 아니라 많은 자발적 희생과 항구한 노력을 부유층에 요구한다. 현대를 위해 새로운 요청을 일러주는 각자의 양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계획된 사업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용의가 있는가? 국가가 더욱 광범위한 발전을 추진하도록 더 많은 세금을 바칠 용의는 있는가? 생산자가 더욱 공정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수입품의 가격을 좀 더 높여 줄 용의는 갖추어졌는가? 후진국을 돕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청춘 시절에 고국을 떠날 각오는 서 있는가? 깊이 반성하자!”

그는 이 질문은 지금도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다면서, “솔직히 말해, 지금 워싱턴의 지배적 메시지(편집자 주- 집권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무역정책)와 교회의 이러한 호소 사이의 대비가 이 이상 더 뚜렷할 수 없을 것”이라고 <CNS>에 말했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news/justice/50-populorum-progressio-takes-new-life-through-pope-fran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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