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처럼 - 영화 '문라이트']

“달빛 아래에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2017. (포스터 제공 = 오드)
영화 '문라이트'의 원작 제목이다. 시적인 문장이지만 영화가 그리는 현실은 마냥 아름답지 않다. 고통과 슬픔을 삼키며 달빛 아래 한 줄씩 새겨 간 시 같다.

가난한, 흑인, 게이, 소년. 주인공 샤이론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다. 계층, 인종, 성 정체성, 연령에서 그는 소수자다.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겹치고 또 겹친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제목의 세 장으로 나뉜다. 소년기, 청소년기, 성인기의 시간 흐름에 따라 샤이론의 성장과 변화를 보여 준다. 키가 작은 리틀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마약중독자인 엄마의 학대와 방치 속에 있다. 청소년기 샤이론에게 친구들의 폭력은 그의 성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 집중된다. 폭력을 되갚고 소년원을 거치며 성인이 된 그는 그토록 싫어하고 멀리하려 했던 마약을 거리에서 판다.

샤이론의 현재는 ‘블랙’이란 이름의 마약상이다. 하지만 그가 계속 마약상으로 살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영화는 그 어떤 장밋빛 암시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샤이론이 진정 강인하고 선한 마음으로 살아 가리라는 믿음이 든다. 샤이론의 성장 과정에서 만나 온 사람들 때문이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무엇이 되어야 할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고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말라”고 가르쳐 준다. 후안은 비록 샤이론의 엄마에게 마약을 파는 마약상이지만 샤이론에게 든든한 ‘어른’이 되어 준다.

'문라이트' 스틸 이미지. (이미지 제공 = 오드)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는 샤이론의 청소년기까지 꾸준히 온전하고 무조건적인 환대를 베푼다. 마약중독이 심해진 엄마가 샤이론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 때 샤이론을 먹이고 재운다. 소수자이기에 오랜 기간 당해 온 폭력으로 눈치 보고 의기소침해 하는 샤이론에게 그가 사랑받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자아 정체성을 고민하는 청소년기에 성 정체성에 대한 이중의 고민을 해야 했던 샤이론에게는 테레사와 같은 사랑이 몇 배 더 필요했을 것이다.

샤이론의 친구 케빈 역시 중요한 존재다. ‘블랙’이라는 별명을 붙여 준 유일한 친구였고 처음이자 유일하게 사랑의 행위를 나눈 연인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캐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등 유명한 퀴어 영화들과는 달리 성애 장면을 낱낱이 보여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인이 된 샤이론이 자신의 이름과 차량 번호까지 ‘블랙’으로 할 때 케빈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샤이론은 오랜만에 만난 케빈 앞에서 지금껏 세상과 싸워 온 무장을 해제하고 마냥 아이 같아진다. 케빈이 만든 구운 닭 요리를 앞에 두고 그는 아마도 돈과 힘을 상징하려 했을 금 틀니를 빼낸다. 테레사 역시 어린 샤이론에게 치킨을 만들어 주었었다. 케빈은 샤이론에게 마약상은 그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말한다.

후안, 테레사, 케빈은 샤이론이 타고난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였다. 그 사랑 때문에, 샤이론이 차별과 폭력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위장해 온 걸 그만둘 수 있을 거라 희망하게 되는 것이다.

'문라이트' 스틸 이미지. (이미지 제공 = 오드)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또 다른 샤이론들에게 그런 존재인가 묻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성애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태도를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인다. 교회는 여전히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57항)는 점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그들을 “존중하고 동정하며 친절하게 대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부당한 차별의 기미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2358항)고 말해 왔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들의 처지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들을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결합시키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2358항)고 한다.

가톨릭교회가 동성애자들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확히 말해 온 것은 반갑고 고맙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이 차별받는 이유 하나가 교회의 단죄에 있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고통을 십자가의 희생과 결합시키는 것은 개인 성화에 요구되는 사명이다. 하지만 그때의 고통은 해소되어야 마땅할 성질의 것은 아니어야 한다.

달빛 아래서는 흑인도, 백인도 똑같은 푸른빛으로 빛난다. 햇빛 아래서 흑인은 까만빛으로, 백인은 하얀빛으로, 모두 무지개 빛으로 자유로워야 아름답겠다.

'문라이트' 스틸 이미지. (이미지 제공 = 오드)

 
 
김유진(가타리나)
동시인. 아동문학평론가. 아동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한다. 동시집 “뽀뽀의 힘”을 냈다. 그전에는 <가톨릭신문> 기자였고 서강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곳에서 아동문학과 신앙의 두 여정이 잘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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