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모태신앙에서 신앙적 사춘기로

어떤 의심과 질문도 없이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하느님을 한없이 믿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모태신앙에 냉담 한 번 해 본 적 없던 내가 지금은 거친 신앙적 방황기를 보내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없다. 그러나 내가 배운 하느님은 특정 누군가의 하느님에 불과하며 어쩌면 내가 믿는 하느님 역시 일종의 ‘세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것이 우상숭배가 아닌가’ 라는 허탈감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주일미사는 꼬박꼬박 나가며 누군가가 종교를 물으면 주저없이 가톨릭이라고 대답하지만, 성당에서 기쁨과 평화를 얻어 집으로 간 지는 꽤 오래됐다. 나를 아껴 주는 사람들은 많은 방법을 조언해 준다. 성체조배, 성경 통독, 규칙적인 기도. 맞다. 이것 없이 오로지 믿는 마음만으로는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 방황의 이유와 해결점이 될지도 모르는 어떤 지점을 발견했다. 영화 ‘핵소고지’와 ‘사일런스’를 통해서다. 두 영화를 통해 지금의 방황이 신앙적 사춘기이며 모든 사춘기가 그렇듯 이 시기를 잘 보내고 나면 더 단단하고 깊은 신앙적 어른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사람, 혹은 너무나 의심이 큰 사람에게 이 두 영화를 보고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신념은 승리한 자의 것: '핵소 고지'

이 영화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최초로 미국의 무공훈장을 받은 한 남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데스몬드 도슨은 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한 청년이자 독실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다(한국에서는 이단으로 분류되는 반면 미국에서는 정식 종교로 인정된다). 그는 애국심을 외면할 수 없어 ‘살인하지 말라’는 교리에 철저히 어긋나는 전쟁터로 향한다. 그곳에서 비폭력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체의 무기를 만지지 않는 집총거부를 선언한다. 상관명령 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까지 회부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줄 무기 하나 없이 의무병으로 일본 오키나와 핵소 고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적진에서 목숨을 걸고 75명의 부상당한 전우들을 구해 낸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명만 더’를 간절히 외치며 신을 찾는 그의 모습은 살아있는 성인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영화는 그가 무공훈장을 받는 실제 영상과 할아버지가 된 지금의 모습으로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그는 젊은 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에요. 신념은 그 사람 자신이니까요.(When you are convinced of something, that’s no joke. That’s what you are)”

▲ '핵소 고지' 중에 한 장면, 멜 깁슨, 2016. (이미지 출처 = 한반지 영화 예고편 처리장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신념은 결과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들기 쉬운 생각은 ‘신념을 포기하지 말고 살자’다. 그의 영웅적이고 희생적 모습에서 감동을 느끼고 그 신념에 찬사를 보낸다. 그에게 신념은 종교적 가르침에서 온 것이었고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심지어 벌을 준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념이란 사실 그 자체로 윤리적 정당성을 가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절대 타협되지 않는 믿음이다. 어떤 신념과 대치되는 신념이 부딪혔을 때, 어느 신념이 더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설사 판단하더라도 신념의 주인에겐 여전히 자신의 신념이 옳은 것이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생긴다. 비이성적인 맹목적 믿음과 신실한 종교적 믿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들었던 왠지 찜찜한 기분의 정체는 바로 일본 장군의 할복 장면에서 온 것이었다. 전쟁에서 져 가는 마당에 한 명의 전우의 목숨이라도 살리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명예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할복하는 장면은 터무니없는 짓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 또한 신념이다. 데스몬드 도스의 신념이 더 우위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슨이 전우를 구하고 마침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의 신념이 할복 자살하는 일본군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한다면, 결국 ‘옳은 신념이란 승리한 자의 것’이라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도슨이 일본 장군보다 진리에 가까운 신념을 따랐다고 본다면 그것은 전쟁 결과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명예보다는 생명을, 집단에 대한 충성보다는 전우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만약 도슨의 행동이 전우를 살리기는커녕 전투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면 그의 믿음은 달리 평가 돼야 할까? 아니다. 태평양전쟁의 승자가 일본이었다 해도 진주만 공습이 정당한 것이 되고 군국주의와 전체주의가 민주주의보다 우월한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 보자. 그것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도슨이 될 수도, 할복하는 일본군이 될 수도 있다. 철저하고 엄격하게 지키는 신앙이 더 우월한 신앙일까? 아니다. 그 신앙이 심긴 마음의 땅이 사랑으로 충만하지 않았다면 신앙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릇된 믿음으로 열매 맺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서 혹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믿음의 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그저 종교적 가르침을 지켜 나가는 데에만 집중하는 모습들을 발견한다.

배신으로 완성한 믿음: '사일런스'

그런데 하느님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고 그곳에서 피어난 믿음을 가졌다 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 있다. 자신의 신념을 철저히 버리고 하느님을 배신해야만 옆에 있는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엔도 슈사쿠의 소설을 영화화한 ‘사일런스’(침묵)에서 선교사 로드리게스 신부는 마치 악마가 인간의 나약함을 시험하는 듯한 너무나 가혹한 딜레마의 순간들을 마주한다. 극심한 박해의 땅 일본에서의 선교를 결심하고 도착한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꿰뚫은 일본인 관리 이노우에의 시험에 든다.

신부인 자신이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자신의 믿음을 철저히 부정해야, 즉 배교자가 돼야 붙잡힌 교우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이노우에는 선교사가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차라리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와 같은 전략을 쓰며 말한다. “이런 무지한 사람. 선한 사제인 듯이 떠들지 마시오. 당신이 진정으로 선한 신부라면 교우들을 불쌍히 여겨야지. 당신의 영광의 대가는 타인의 고통일 뿐이오.”

이 딜레마에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고 답을 청해도 하느님은 침묵하고 로드리게스 신부는 그 침묵을 원망하지만 선택의 순간 마음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한다.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다.” 그후 로드리게스는 철저히 배교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일본인 아내를 얻고, 주기적으로 성화를 밟으며 죽은 뒤에는 불교식 장례가 치러진다. 

겨우 200년 전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고 그 믿음의 씨앗으로 오늘날의 열매를 일군 한국 교회에서 순교란 그것을 통해 성인품에 오를 만큼 거룩한 것이며 굳건한 믿음의 상징이다. 관점에 따라 로드리게스 신부의 이야기는 한 배교자의 이야기에 불과하며 그가 들은 하느님의 음성은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느님도 그의 선택을 괘씸히 여겼을까? 그간 우리는 순교자의 영광에 대해서만 가르침 받아 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에게만 당신의 자애를 베푸셨을까?

▲ '사일런스' 중의 한 장면, 마틴 스콜세지, 2017. (이미지 제공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세상의 판단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종교

로드리게스 신부가 포르투갈에서 계속해서 신부의 삶을 살아갔다면 큰 죄를 지을 일도 없이 편안한 생을 살아갔을 수 있다. 일본 신도들이 죽더라도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다같이 순교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른 이들의 목숨까지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이자 자존감의 근거인 신부의 지위를 버린다. 조국으로부터 평생 배교자로 낙인 찍히고, 여생을 낯선 나라에서 낯선 종교를 받아들인 채 사는 선택을 한다. 그의 고뇌와 선택을 하느님은 오히려 눈물겹게 바라보시지 않았을까?

영화가 끝나면 대체 그동안 믿어 온 것이 무엇인지 혼란에 휩싸인다. 내게 중요한 것은 교리인가, 믿음인가, 사랑인가 그것도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마음 그 자체에서 위안을 얻는 것인가? 로드리게스 신부의 고뇌와 선택, 그리고 여생이 가슴에 와닿자, 그간 스스로 자신했던 신념이 얼마나 얄팍하고 편리한 것이었는지 느끼고 부끄러워졌다. 동시에 신앙의 사춘기가 꼭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편하게 습득된 모태신앙의 매너리즘이라는 껍질을 깨고, 철저히 혼자서 고뇌하고 방황한 끝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또한 세상의 판단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꼈달까. 어떤 사람이 지닌 신념의 실체는 그 자신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데 너무나 쉽게 세상으로부터 판단당한다. 로드리게스가 체념한 듯한 배교자로서의 여생을 살아 내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영화는 불교식으로 화장되는 그의 손 안에서 순교했던 교우로부터 받은 작은 나무 십자가를 보여 준다. 그 작은 십자가를 평생 숨기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던 배교자 로드리게스의 믿음을 세상 그 누가 알았을까.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딜레마에 부딪힌다면 그 고뇌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보자. 세상이 말하는 진리와 교리에서 잠시 멀어져서 내 안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귀 기울여 보자. 사춘기가 그런 것 아닌가. 그 혼란의 끝에 신앙적 어른이 되어 있을 테니.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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