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연 박선아 사무국장

우주적 오지라퍼. 어떤 이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천정연) 박선아 사무국장을 이렇게 부른다. 거리 미사, 교회가 연대하는 현장을 취재할 때마다 가장 자주 마주쳤다. 미사를 준비하고 정리한다. 앞에 나서진 않는다. 늘 현장에 있지만 주변에 머물러서 사진에 잡히지 않는다.

지난 13일 서울에서 ‘고 신효순, 심미선 15주기 추모제’가 있는 경기도 양주까지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박선아 사무국장에게 대한문 앞에서 잠도 안 자고 돌아다니면서 이불을 덮어 주는 것을 봤다며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좋아?”라고 말했다. 2013년 여름, 밀양 송전탑과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밤샘 기도회에서의 일이다. 당시는 박 씨가 그저 신자로서 대한문 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던 때다. 그는 할머니에게 “제가 원래 그런 것만 봐요.”라고 답했다.

2015년 백남기 씨가 쓰러진 뒤 그는 천정연 사무국장으로서 서울대병원을 지켰다. 매일 미사를 준비했고, 유가족과 함께했다. 지금은 “엄마보다 백남기 선생님 사모님과 통화를 더 자주한다.” 그는 상처받고 고통받는 이들 속에 잘 녹아든다. 애써 준비하거나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병원에 가서 ‘어머니 저 왔어요’라며 말을 붙인다. “사실 그 경황에 제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그렇게 돼요.” 전화로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묻자, “그냥 사는 이야기”란다. 학생운동을 했던 그는 지금도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곤 한다.

어릴 때부터 ‘눈치 빠르고, 애 같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도 어떤 이는 그가 어디에나 있으면서, 온갖 현장을 돕는 걸 못마땅해 한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하려고 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할 수 있으면 같이 하면 되지, 뭘. 깊이 없게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지 말자고 조심은 해요.”

▲ 백남기 사건 수사 촉구 1인 시위 중인 박선아 씨. (사진 출처 = 백남기 투쟁본부)
이런 말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이 오지랖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대신 하느님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라는 소명도 주셨다고 느낀다. “내 생겨 먹은 거예요. 내 오지랖이고.”

천주교 사회운동과 연을 맺은 계기는 2013년 대한문 미사다. 그는 대학에 들어간 뒤부터 성당에 나가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정말 있다면 세상이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문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를 보며 “내가 밀어냈던 교회가 사실은 진짜 낮은 곳에 있었구나”라고 감동받았다.

그는 “그때가 가장 좋았다”며, “대가 없이 마음으로 (미사를) 도왔다”고 돌아봤다. 당시 많은 평신도, 수녀, 신부와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어쩌다 그가 사제, 수도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너무 위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그들 눈에는 내가 영향력 있는 사람일 수 있지만, 난 그걸(영향력) 이용할 주제도 못 되는데.....”라며, 관계가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했다. 사제, 수도자를 떠나서 그에게는 같이 연대하는 동지다.

대한문 미사로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학생 때 “시뻘건 운동을 했던” 그는 평생 사회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지금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셈이다. 학생 때 했던 운동은 사안에 대응하는 방법이나 목표가 명확했지만, 그는 아직 천주교 사회운동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하느님나라 건설이라는 목표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정말 하느님나라가 무엇인지는 고민 중이다. 다만 학생운동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을것 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포도밭에 아침에 나오든 저녁에 나오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줬던 예수님의 마음처럼 모든 사람이 같이 행복하게 잘 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는 천주교 사회운동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입으로만 따르는 모습을 보면 아쉽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 속으로 스며들어 함께하는 이들을 보면 어떻게 운동을 이어갈지 보인다.

그는 이달에 인천교구 6월항쟁 기념행사, 광화문 월요 시국미사, 고 신효순 심미선 15주기 추모제, 콜트콜텍 노동자를 위한 미사,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 등을 연대하고 준비했다. 이외에도 사드 반대 투쟁, 백남기 투쟁본부 등에도 함께한다.

역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그다. 이 인터뷰도 기자에 대한 연민 때문에 수락했다.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관계가 틀어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부끄럽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 오지랖 때문에 기자 앞에 앉았다.

▲ (위) 인천교구 6월항쟁 기념행사에서 박선아 씨. ⓒ배선영 기자; (왼쪽 아래) 인천교구 노동자 도서관 개관식에서. (사진 제공 = 박선아); (오른쪽 아래) 서울대병원 앞에서. ⓒ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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