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연중 기획 - 여성 3]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2017년 6개의 주제로 연중 기획을 진행합니다. 6월 기획의 주제는 ‘여성’이며, 세 사람의 인터뷰 기사로 가톨릭교회와 페미니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 편집자

기사 순서

1. 청년 여성 신자 박유형 씨
2. 주교회의 여성소위 총무 박은미 씨
3. 문학 연구자 조현지 씨

탄생부터 집안 어른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일제시대 초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친할머니는 매우 성차별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지요.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매우 구박을 받았기 때문에, 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여성’으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번 특집의 마지막 손님 조현지 씨(아녜스)가 꺼낸 과거 이야기 중 한 대목이다. 현지 씨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아들이 아니어서 태어나지 못할 뻔했고, 늘 ‘아들 못지않은’ 손녀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이런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내가) 남성을 사랑해야 하는 이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조현지 씨는 문학 연구자로 외국에 머물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며칠 동안 인터넷 메신저 대화와 이메일이 오갔다.

그는 한국의 ‘영 페미니즘’을 경험하고 참여한 사람 중 하나다. 서강대 학부생이던 2000년대 초반은 여러 대학에서 총여학생회나 여학생위원회 활동이 한창이었고, 그도 서강여성위원회에 참여했다.

여학생 자치단체들이 활발하게 반성폭력 학칙, 성폭력상담소 설치를 요구하고 만들어 나가던 때였다. ‘월경 축제’ 등 여러 여성주의 축제가 열렸고, ‘달나라 딸세포’를 비롯한 페미니즘 매체, 포털 사이트 ‘언니네’가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다.

천주교에도 ‘여성주의’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 문학 연구자 조현지 씨 (사진 제공 = 조현지)
페미니즘 활동에 열중하는 동안 그는 가톨릭교회를 떠나 있었다.

“남성의 손으로만 축성할 수 있는 빵을 먹으러 매주 미사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리 강론이 좋아도 하느님의 말씀은 남성의 목소리로만 전달되어야 하는 교회가 숨막혔습니다.”

한때는 개신교 신자가 되고자 했지만,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성당에서 자란 사람”이 가톨릭 문화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천주교로 돌아온 계기는 수녀가 진행하는 가톨릭 성서 모임이었다. 그는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여성주의적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수녀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또 한편, 교회로 돌아온 결정적 계기는 교수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 있었다. 조현지 씨는 서강여성위에 참여하는 동안 우리 사회 전체에서도 큰 논란이 된 서강대 K 교수, H 교수 사건을 겪었다. 국문과 H 교수 사건 때는 국문과 학생이던 조 씨도 개인적 관계들과 얽혀 어려움이 컸다.

“믿었던 여자 선배들과 결정적 여자 증언자들이 등을 돌리면서 여성들의 연대에 깊은 회의를 느끼던 때, 여성주의와 무관해 보이는 남자 선배가 돌연 증언을 약속했습니다. 그 선배는 오로지 신앙과 양심을 이유로 당시 석사논문 지도교수와 반대편에서 증언했습니다. 지도교수는 가해자 편에서, 그 선배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피해자 편에서 증언한 것입니다.”

최근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된 그 선배의 모습은 조 씨뿐만 아니라 피해자 편에 선 다른 증언자, 그리고 양성평등상담소 담당 교수의 신앙에도 영향을 줬다.

“종교로 돌아온 뒤, 가톨릭 문화가 보수적일지라도 저에게 익숙하고 너무나 편했기 때문에, 한동안 여성주의 운동을 회개해야 할 과거로 보기도 했습니다. 페미니스트로 온갖 욕을 먹으며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들과 싸우다가 지칠 대로 지쳤는데, 익숙한 곳에 돌아와서 ‘Brother’ 수사님과 ‘Father’ 신부님, 그리고 ‘형제’들로부터 ‘자매’로 존중받고 사목적 보호를 받으니 가부장적일지라도 한편으로 너무 안락하고 좋았던 거죠.”

이성애자로서 다수에 속하는 삶을 편안히 누리게 되니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잃어 갔다. 생각도 점점 보수적으로 변했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잃었다. 그러던 중 신앙 깊은 친구가 성소수자로 ‘커밍아웃’하는 과정을 지켜본 것이 다시 ‘신앙’과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를 함께 부르는 약어) 담론을 동시에 고민하게 했다.

“어렵지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은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바라보게 된다고 믿습니다. 더불어 보수성과 다수성에 힘입어 누리는 일말의 안락함이 진정 신앙적인 것인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날이 진보하는 그 친구와의 대화 덕분에 여성주의적 감각을 조금씩 되찾아 가는 것 같아요.”

▲ 2013년 한 청년 프로그램 미사에 참례한 여성 신자들이 영성체하고 있다. ⓒ강한 기자

‘섹슈얼리티의 영적 측면’을 고민해야

‘나는 가톨릭 페미니스트로소이다’라는 이번 여성 특집의 원래 제목을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조현지 씨의 첫 번째 대답은 ‘가톨릭 페미니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저에게 가톨릭과 페미니즘은 별개의 개념입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 여성이고, 가톨릭 신자입니다. 이 두 정체성이 항상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고, 때로 서로 충돌할 때도 있지요. ‘가톨릭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통해서, 가톨릭과 페미니즘이 충돌하고 있는 여러 쟁점들을 무마시키면서 가톨릭 안에서 수용되기 쉬운 범주로 페미니즘을 제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됩니다.”

교회에 돌아왔지만, 천주교 안에서 성차별, 심지어 ‘미소지니’(misogyny, 여성혐오)라고 느끼는 경험은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사제나 수도자, 더 나아가 여성 신자들도 여성혐오적 말과 행동을 한다”며 “한국 사회 전반의 여성혐오로부터 교회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특히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서 영향력이 큰 사제들이 여성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경우다. “일방적으로 여성을 ‘유혹자’로 평가절하하는 농담을 듣기도 하는데, 이는 성적 대상화, 성희롱에 지나지 않아요. 이런 말의 폭력을 주의해야 합니다.”

조현지 씨는 무엇보다도 신학생을 양성하는 교수 사제나, 앞으로 신학교 교수가 될 수도 있는 유학 사제들이 여성의 존엄함과 섹슈얼리티의 영적 측면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신학교에서부터 여성주의적 감수성 교육을 고려하고 이와 관련된 신학생 자치활동, 여성 교수의 비율을 높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 2000년대 중반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열린 '성평등 문화제'. 여성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설치물들이 교정 한복판에 전시돼 있다. ⓒ강한 기자

가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그는 천주교와 페미니즘의 “현상적 갈등에도” 둘은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고 했다. “두 가지는 같은 층위에 있는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에서 페미니즘이 백안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가톨릭 신자’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두 가지 정체성의 공존을 모색하는 일은 어렵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현지 씨에게는 ‘가톨릭 신자로서 페미니즘을 긍정하는 이유’와 ‘페미니스트로서 가톨릭교회를 긍정하는 이유’가 모두 있다. 그는 우선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의미 그대로, 인류애를 근간으로 인간의 모든 지적, 실천적 활동들을 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께는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탈식민주의든 여성주의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로지 인간의 존엄과 행복에 도움이 되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방향을 조정하는 것만이 그분께 중요하지 않을는지요?”

또한 그는 “천주교는 ‘희망’을 말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앙인으로서 여성은 창조주에 대한 신뢰 안에서 자신의 성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을 부정당했을 때도,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 받고 상처 받았을 때조차도, 그 상황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희망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는 ‘보편적’인 가톨릭 신앙이 페미니즘을 도와줄 수 있다고 본다. 페미니즘이 급진적인 여성들만 공유하는 특수 문화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는 “가부장제를 스스로 반성하고자 하는 ‘보편성’이라면 페미니즘과 공존 가능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문화의 토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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