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8월 20일(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예수가 이방인 여인의 믿음에 대해 칭송한 오늘 복음을 두고 대개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예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이방인 여인의 겸손이 그것이다. 비록 예수가 ‘이스라엘 집안’, ‘자녀들의 빵’이라고 언급하면서 이방인 여인을 밀쳐내는 듯한 언행을 보였다 하더라도, 종국엔 예수가 이방인 여인의 딸을 낫게 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구원이요, 그런 구원은 여인의 겸손한 태도, 곧 ‘강아지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자기 낮춤 덕택이었다 대개들 해석한다.

우린 오늘 복음을 통해 보편적 구원과 겸손이라는 단어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전체주의적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죽어 갔다는 논리는 ‘관계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는 분명 모든 이를 향한 희생을 보여 주었지만, 그 모든 이의 범주는 그 희생을 받아들이는 이의 태도에 따라 유동적이다. 이를테면, ‘난 괜찮아!’, 반대로 ‘모든 걸 알아서 해 주시겠지’ 등의 태도는 예수의 희생을 거부하는 태도와 같다. 사는 게 바쁘고 그다지 바랄 게 없거나 바랄 이유도 찾지 못하는 이는 예수와 무관하다.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구원을 무작정 기다리는 태도 역시 예수가 함께 걷자고 초대한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외면하는 처사다. 예수의 보편적 구원은 기다리고 갈망하는 이들의 것이다. 보편적 구원은 상대를 무시하고, 상대의 태도를 전혀 고려치 않는 하느님의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가 아니다. 예수가 언급한 ‘이스라엘 집안’, ‘자녀들의 빵’은 예수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사명, 나아가 자신의 원의를 너무나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민족주의적 차별의 단어가 아니라 예수의 자리를 특정지으며 가나안 여인의 자리와 다르다는, 그래서 가나안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여지를 남겨 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가나안 여인과 예수', 후안 더 플란데스.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믿음은 하나의 자리에서 크다, 작다를 논하는 게 아니다. 믿음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깨달은 자에게 완전한 것이고 그건 애당초 다른 이와의 비교로 이루어질 게 아니다. 가나안 여인의 태도를 굳이 겸손이라는 단어로 규정한다면, 그 여인의 겸손은 자기 비하나 자기 포기가 아니라 철저히 자기를 찾는 작업이 된다. ‘강아지의 자리’, 그곳이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찮고 비루한 자리라 여긴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자기 포기다. 가나안 여인은 딸의 치유를 위해 모든 걸 던지는 심정이었으리라. 가나안 여인은 어떻게든 자기 원의를 이루려는 사람이지 자기를 포기하고, 딸의 치유를 단념하는 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나안 여인에게 겸손은 어떻게든 자기를 찾으려는 이의 투쟁적 노력이다. 대개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겸손은 외면이거나 무관심, 아니면 자기 체면의 유지 정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그런 겸손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그저 네가 알아서 하라는, 그것으로 제 의지와 제 고유함을 숨기는 전체주의적 자기 파괴에 가깝다.

오늘 우리는 강아지의 자리가 되었든, 자녀의 자리가 되었든, 제 자리가 어딘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이스라엘 사회를 위해, 그 사회에 포탄처럼 던져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명쾌하게 하느님을 드러내고 살았다. 그런 예수가 2017년 대한민국에서 똑같이 산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달라지지 않는다. 2017년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이들이 가나안 여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이 땅 이곳에서 강아지가 되든, 그 무엇이 되든 대한민국인으로 살아갈 때, 예수는 살아 있고 우리는 변한다. 구원은 제 삶 한가운데 메시아가 올 길을 닦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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