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성령대회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는 지인분이 물어 오셨습니다. 성령대회에 가면 심령기도라는 것을 하는데, 이것이 마치 개신교인들이 하는 기도 같아서 거부감이 드셨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을 받고 보니 가톨릭의 조용한 분위기에 익숙한 신자분들이 종종 개신교 예배(worship) 분위기에 대해 가지는 인상, 즉 소란스럽다고 여기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는 걸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예배는 과연 시끄러운 걸까요? 

엄밀하게는 개신교의 일반적인 예배와 부흥회라고 하는 모임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즉, 정규 예배가 말씀과 성만찬을 중심으로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라면, 부흥회는 상대적으로 찬양 시간이 많아 노래와 율동, 통성기도 등이 동반되기에 긍정적으로는 생동감 있는, 부정적으로는 어수선한 분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예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우리는 그게 그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지는 못하는 터라 이에 대해서 설명을 더하는 것은 피하고, 성령기도회와 얽혀 있는 기도 방식 정도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령세미나, 성령기도회, 성령대회 등의 모임은 성령쇄신운동(Charismatic Renewal Movement)의 세부활동입니다. 성령쇄신은 세례, 견진, 신품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성령이 더욱 활기차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달라고 하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워지는 것을 성령세례를 경험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칠성사에 성사 하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받음으로써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하려는 것입니다.(가톨릭대사전, “성령쇄신운동” 항 참조)

가톨릭 안에서 성령쇄신은 1967년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듀케인 대학에서 몇몇 평신도 신학교수와 학생들의 기도모임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이 기도 모임에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동참하게 되었고 국제적 운동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초기 모임에 참가했던 성직자와 수도자 몇 분을 통해, 한국에는 1971년에 도입되었다고 하니 매우 빨리 전파된 셈입니다. 그 뒤 수차에 걸친 성령세미나가 있었고, 1973년 12월 5일에 가톨릭 성신운동협의회가 창설되었으며 뒷날 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로 개칭되었습니다.(같은 책 참조)

개신교 기도회에서는 종종 신자들이 손을 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성령쇄신운동은 그 역사가 길지 않음에도 번져 나간 속도를 보면, 타이틀만큼 성령께서 함께하셨다고 여겨집니다. 분명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통해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취지가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 대부분에게는 성령기도회의 진행 분위기가 낯설게 다가올 것입니다. 조용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먼저 다가오는 차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생경함의 중심에 “심령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용어인 “방언”은 개신교에서 쓰는 용어이고, 가톨릭에서는 심령기도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심령기도는 성령이 오셨음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하지만 모든 신자가 다 심령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이 따로 있을 뿐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세례와 견진을 통해 이미 성령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심령기도를 하는 이들을 통해 성령이 우리 주변에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령기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심령기도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는 해석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심령기도도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이고 해석의 은사도 그 중 하나입니다.(1코린 12,10 참조) 

심령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옆에서 하는 심령기도를 천상의 언어라고 이해하고 들으면 되겠습니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정도가 심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흐느끼고, 울고, 절규하는 정도가 심해지면 함께 기도하러 갔던 경험 없는 참가자들은 매우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많은 신자로 하여금 성령기도회에 대해 부정적 감정이 들게 하는 요인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역사 내내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언제나 언어의 은사, 예언의 은사, 능력/기적의 은사 등이 선물처럼 주어져 왔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능력에 관한 것으로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을 통해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은사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은사의 기본이 심령기도(언어의 은사)라는 오해입니다. 예언을 통해서도 공동체가 나가야 방향이 제시되어야 하고, 능력을 통해서도 공동체가 치유와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정리해서 말씀드리죠. 성령기도회를 이끄는 중요한 기도 방식인 심령기도는,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이 누군가를 통해 그렇게 드러날지 말지와 관련된 은사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심령기도를 은사로 받은 분은 그 방식을 통해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드러내 보여 주셔야 합니다. 더불어 다른 은사들도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늘 주어지는 도전이 있으니, 그런 은사가 언제나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뉴스가 있잖습니까? 신도들을 엄청나게 모아들여 부자가 된 교회의 현실은 세상과 소통하려 하지 않고, 교회의 재산이나 이권 등과 관련한 문제로 공동체가 갈라지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방언”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런 뉴스가 마음을 더 시끄럽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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