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회로 가는 길 - 호인수]

한국교회의 대표적 성당인 명동 대성당. (사진 출처 = Flickr)

한국 천주교회는 20세기 후반 산업화와 민주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교세가 급성장해 왔다. 인구 대비 3퍼센트 정도였던 신자들이 10퍼센트를 넘어서고 그에 따라 새 본당들이 신설되고 전국에 둘밖에 없던 신학교가 일곱 개로 늘었다. 전 세계에서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자랑하는 한국교회만의 현상이다. 이런 부정할 수 없는 통계표를 앞에 두고 하나 묻자.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단순한 질문이다. 십자가 지붕이 늘어나고 신자가 많아졌으니 세상은 전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되었나?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졌나? 열 사람에게 물어봐도 답은 하나같이 똑같다. “아니다!” 

“그렇다!”라는 대답이 나와야 당연한 것 아닌가?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은 곧 세상변혁운동이다. 예수는 그 운동에 목숨을 걸었으니 교회의 본연의 임무 역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고치는 일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두 배, 세 배로 많아졌는데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 완벽한 ‘하느님나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리로 가는 작은 조짐조차 감지가 안 되나? 왜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불안하고 고달프고 불행한가? 세례받은 신자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되면 어떨까? 지금까지의 신자 수 증가와 사회변화의 실상을 살펴보면 긍정적인 답이 안 나온다. 왜 그럴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작금의 교회가 본연의 임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일차적 책임은 성직자에게 있다. 여러 번 말하지만 한국교회는 유독 성직주의가 만연된 수직적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성직자들에게서 교회가 제 구실을 못(안)하는 데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교구마다 본당마다 교세확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작고 낡았다는 이유로 건물을 부수고 새 성당이나 교육관 짓기에 바쁜 본당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성당이 늘어나고 신자가 많아지는 것이 세상이 좋아지는 것과 무관하다는 대다수 신자들의 안타깝지만 예리한 지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선교란 종교의 이념을 퍼뜨리는 것이나 윤리적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2017년 전교주일 담화)라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착각하지 말자. 교회는 하느님나라를 지향하는 공동체임에는 틀림없으나 교회가 곧 하느님나라는 아니다. 만에 하나, 교회가 ‘교회=하느님나라’라는 등식을 세워 놓고 복음 선포에 소홀하고 조직의 강화와 확장과 안보에만 골몰한다면 제 이익이나 추구하는 영업집단으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다.

평생을 예수처럼 사시려 혼신의 힘을 다하고 돌아가신 ‘내 친구 정일우’ 신부님은 말했다. 가난이 교회를 구원한다고. 내가 본 그분은 더 큰 교회, 더 많은 신자를 욕심내 본 적이 없다. 더 큰 성당, 더 많은 신자가 더 센 교회의 표상일 수는 있으나 권력의 상징인 빌라도 앞에 초라하게 서 계시던 예수의 모습은 아니다.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원로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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