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아래 내용은 고해성사와 관련되어 일반적으로 들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고백자를 특정하거나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누가 그랬는지 알리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백의 비밀을 누설하고 있다는 오해는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마음씨 착한 친구 신부가 물어 왔습니다. 고해성사를 하다 보면 가끔씩 이런 고백도 듣게 된다고 합니다. 전에 받은 보속을 하지 않았다, 보속을 하기 싫을 때는 어떻게 하냐 등의 고백 및 상담요청이 그 내용입니다. 그 질문을 제게 다시 물어 온 것입니다. 어림해 보면 그 사제의 품성상, 고백하러 온 분의 사정을 좀 더 찬찬히 듣고 그분의 마음을 달래 보려 했을 것 같습니다.
전 고해성사 때 받은 보속을 하지 않았거나 보속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은 "보속은 안 해도 되지 않나요?"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고해를 하는 당사자가 보속을 자꾸 미루고, 하기 싫다고 한다면 마음씨 착한 동료 신부처럼 무슨 사정인지 좀 더 들어 보는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청하는 신자분도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속은 우선, 개인이 저지른 죄를 깊이 뉘우친다는 표시입니다. 또한, 벌인 잘못을 기워 갚으려는 노력입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그 피해를 보상해 주는 것과 같이 실제적인 보속도 있습니다. 이렇게 갚아야 할 것까지도 나 몰라라 한다면, 그는 고해성사를 악이용하는 셈입니다. 자기 마음의 평화는 구하면서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과한 이기심이며 또 다른 죄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성사의 고유한 성격이 훼손되는 경우, 그 성사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웃과 맺은 관계가 어그러져서 하느님과도 서먹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해성사를 청합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를 회복해 보려는 마음과 태도가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즉, 회심하려는 원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애초에 회심할 의지가 없다면, 즉 무질서하게 어질러진 생활을 인식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고해성사는 일종의 위선적 행위가 될 것입니다.
무겁고 찜찜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일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보속을 할지를 고해를 한 당사자가 제안해 보는 방법도 가능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회심 의지를 설명한 것처럼 말입니다.(루카 19,8 참조)
배경적으로는 보속은 초기 교회 공동체가 공동체에 잘못을 저지른 구성원에게 준 벌에서 유래합니다. 당시에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죄를 고백하는 이가 그만큼 진정성을 가지고 회심을 드러내 보여야 그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강제력이 없으므로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경찰이 달려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죄를 지었는가가 성사생활을 할 수 있고 없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보속에 관한 일종의 원칙이 있다면, 보속은 고해를 청하는 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생계문제 때문에 날마다 새벽같이 인력시장에 나가야 하는 이에게 일주일 피정을 다녀오라고 한다거나 마음에 심한 상처를 준 사람을 찾아가 당장 화해를 하라고 하는 식의 보속은 성사를 청하는 이의 사정을 무시한 요구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그 신자가 결국 보속을 해결하지 못하는 또 다른 죄를 짓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배려심이 뛰어난 어떤 선배 신부님은 그래서, 고해성사를 하면서 보통 보속으로 주모경을 권해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예 고백을 하러 왔던 신자와 함께 주모경을 바치고 그 사람을 돌려보냅니다. 보속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고해소를 나가 길을 가던 중에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기에 조금이라도 벌을 덜어주는 게 좋겠다는 취지라고 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나요?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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