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김재욱] 전제우 프란치스코를 기억하며

2010년부터 2017년 4월까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국장으로 일했던 전제우 씨(프란치스코)가 지난 11월 24일 폐결핵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추모하는 수원교구 공동선사제연대 김재욱 사무국장의 글입니다.


1.
내가 천주교 사회사목 활동을 시작한 것이 2008년 여름 수원교구 공동선 실현 사제연대 사무국장을 맡으면서부터이니 벌써 10여 년이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에서 만났다.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 땅을 빼앗긴 농민들, 빼앗기고 밀려나고 진압되고 배제되는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믿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그들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기 자리를 지키던 제우 국장을 만났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 사진기를 들고 동분서주하던 제우 국장을 처음 봤을 때 난 그가 그냥 평범한 사진기자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2010년 두물머리에서 만나 처음으로 통성명을 하면서 그가 사제단 사무국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밀양에서, 대한문에서, 팽목항에서, 평택 송전탑 앞에서, 우리는 약속도 없이 그냥 만났다. 내가 가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렇다고 제우 국장과 각별한 친분을 쌓지도 못했다. 얼굴 보면 가벼운 목례와 눈 인사, 안부 몇 마디 전하고 서로에게 실무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는 정도가 그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그래도 거리 미사에 참석하게 되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사람이 그였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제우 국장은 거리 미사를 완성하는 하나의 퍼즐 조각 같은 존재가 되었다.

2.
가재는 게 편이요,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서로 비슷한 일을 하던 그와 나는, 만남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무언 중에도 동병상련의 정이 우물처럼 깊어 갔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고충과 애환을 잘 알았고 공감했다. 그래서인가? 도움이 필요할 때 제일 먼저 연락하게 되는 사람이 제우 국장이었고 나 역시 제우 국장의 부탁은 모든 업무 중 1순위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대한문 앞 매일미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전제우 프란치스코. 그는 거리미사를 지키며 사진을 찍었지만 정작 그 자신의 모습은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사진 제공 = 최미경)

2016년 9월 25일 백남기 어르신께서 돌아가셨고 제우 국장과 함께 천주교 실무를 맡았다. 우리는 매일 사제단 사무실과 서울대병원으로 출근했고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고 일했다. 그를 만난 지 7년여 만에 우리는 처음 함께 일했다. 고기는 씹을수록 맛이 나고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고 제우 국장은 차분하고 성실하면서도 자기 고집도 있고 무척 예민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대학로 허름한 주막에서 통음을 하며 형, 동생이 되었고 서로의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으며 하소연도 하고 맞장구도 쳤다. 그동안 제우가 용케도 잘 버텨 왔구나 짠한 마음이 들어 눈시울도 붉어졌다. 제우는 자기도 결혼하고 싶다며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하라고 했지만, 알았다, 연락할 게,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그 약속은 들어주지 못했다. 

제우가 건강 문제도 있고 사제단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고 싶다는 고민을 말했을 때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오십 줄이 넘은 나이에 나도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제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살 것 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라.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일, 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살펴보고 준비해도 결코 늦지 않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좋아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지금 하는 일이고 또 어디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사제연대에 뼈를 묻고 싶다." 나는 제우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고 싶었다.

3.
사제단 사무실을 방문할 때마다 제우는 내게 따뜻한 커피를 사다 주었다.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고 커피가 식지 않도록 도착시간에 맞추어 커피 배달을 했다. 사제단을 그만두기로 결정한 그날도 제우는 커피를 들고 사제단 건물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삐쩍 마른 체구의 볼품없는 작은 이가 나를 환대해 주었다. 나는 제우가 그만두려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제우도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서운한 마음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제우와 나는 한 번도 기쁘고 축복된 자리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가 만나는 곳은 언제나 슬픔과 고통이 있는 곳, 억울한 이들, 가난한 이들의 설움이 북새통인 자리였다. 제우는 내가 만난 작은 예수였다.

4.

산을 무척 좋아했던 그였다. 쌍용차 해고자들과 함께 산을 오르던 날. (사진 제공 = 쌍용차노조)

광화문 시국미사 마지막 날, 제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따뜻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나중에 시간 내어 소주나 한잔하자고 통화한 것이 고작이었다. 눈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은 그만큼 더 가까워져야 하는 것이 참 우정이라는데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져 갔다. 몇 번의 전화가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통화를 못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스스로 합리화하며 바쁜 일상을 핑계로 서서히 그에게 무관심해졌다. 그렇게 무심하게 살다가 지난 11월 13일 한밤중에 제우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그 길로 제우가 있는 상계 백병원으로 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러움과 죄스러운 마음만 가득하여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면회객들도 모두 돌아가고 없는 상계 백병원 중환자실 문 앞에 도착했지만 제우를 만나지 못했다. 나의 무관심만큼이나 중환자실 자동문은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내가 부지불식간에 높게 세운 그 무관심의 벽이 제우와 나를 중환자실 안과 밖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제우가 홀로 투병생활을 했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제우가 작별 인사도 없이 하늘나라로 떠난 그 시간에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제우의 부음을 알리는 전화 벨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제우 덕분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제우는 영원히 잠들었다. 누군가 제우 국장을 재욱 국장으로 착각하여 내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나는 제우 덕분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황급히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낯익은 얼굴의 조문객들과 신부님들을 만났다. 모두가 침통함과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우와 동갑내기 친구인 루시아 자매가 나를 기다렸다며 접객실 귀퉁이로 이끌었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했다. 거듭되는 술잔에 친구를 잃은 그녀의 슬픔과 설움과 원망은 너무도 쉽게 내게 전이되었고 그 이후의 내 언행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쌍용차 복기성 형제와 복도에서 말 없이 부둥켜안고 통곡했던 일, 화가 난 듯한 김영미 수녀님의 얼굴, 그리고 새벽녘 썰렁해진 빈소에 홀로 남겨진 내 모습이었다. 제우의 장례 미사를 앞두고 나승구 신부님께 제우 장례 미사 해설을 내가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을 드렸다. 생전에 농담 삼아 장례 미사 해설은 내가 해 준다 했던 약속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정작 지켜야 할 약속은 못 지키고,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은 지켜 버렸다.

요즘도 가끔 제우 생각이 난다. 두물머리 시절 이후 잠잠했던 병이 다시 도진 듯하다. 잎들이 남김 없이 떨어져 벌거숭이가 된 앙상한 나뭇가지만 쳐다봐도 제우 생각에 눈물이 난다. 가을처럼 떠나간 제우의 빈자리는 아직도 황망하다. 죽음을 보면 그 사람의 살아 온 삶을 기억하듯. 늘상 우리들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며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 준 제우를 기억하며 다시 마음을 추스르려 노력한다. 사랑하는 제우야, 그동안 많이 고마웠다. 그리고 보고 싶다.

김재욱(플로렌시오)

수원교구 공동선사제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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