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오늘부터 매월 두 번째 화요일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 연재됩니다.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을 통해 평신도의 길과 성직자의 길이 다르지 않음을 일깨우고, 진리된 말씀을 실천함이 교회 쇄신의 길임을 전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김용대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 하느님의 친구들은 두 종류가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제대로 이해했다면,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도입부로, 구약성경은 많은 무거운 의무를 지워 주고 죄를 지으면 천국의 문은 5000년 동안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에 신약성경이 성령을 통하여 평화와 기쁨을 보여 주기 전까지 내가 이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새로운 섭리를 받아들이려면 즉 슬픔의 무거운 짐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잘못 생각하고 있을까 봐 두렵습니다. 온고지신입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성체를 받아 먹고 그리고 진심으로 하느님의 멍에는 편하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항상 여러분이 앞으로 고통받고 절망하고 불명예를 당하고 중상모략을 당하더라도 형제자매 여러분, 대주교들은 한숨을 쉬며 여러분이 1년이나 2년 동안 말라리아 열병처럼 앓게 되면 구약성경 시대에 겪어야 했던 다른 시련은 이는 평생 후회하며 괴로워하는 내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겸손하게 되면 이렇게 수없이 고백하더라도 또 다른 시련은 새로운 위로를 바라면서 헛수고를 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태까지 본 사람 중에서 그는 평생 네다섯 개의 강론밖에 듣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그러나 여러분이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려면 왜냐하면 여러분이 참된 영성을 얻으려면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말고 아무리 말을 많이 하여도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의 좋은 면은 좋게 보되 선조들이 과거의 율법에 따라 살았듯이 구약성경의 세 번째 특성은 ‘구원에 대한 희미한 희망’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하느님의 때와 장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언제냐고요? 하느님께 맡겨두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650-653쪽) |
종교개혁 전에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지나치게 죄의식을 심어 주고 심판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 중심의 고해성사를 하게 함으로써, 신약성경에서는 사랑이 제1계명이지만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드물었으며 사랑하지 않은 것을 고백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죽을 때에도 사랑하지 않은 것을 고백하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신약시대임에도 구약성경 따라 살아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율법과 계명에 따라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울러 신부는 이를 꼬집었지만 종교개혁 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참 사랑을 하는 사람이 드문 것이 현실이지만 고해하고 이타심을 발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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