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 정민아]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2018. (포스트 제공 = 영화사 수박)

‘무한도전’, ‘1박2일’, ‘남자의 자격’같이 오랫동안 예능계를 평정했던 남자들의 놀이 프로그램이나, ‘아빠 어디가’, ‘아빠를 부탁해’처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예능 프로그램이 지나간 자리에, 함께 밥해 먹고 쉬엄쉬엄 노는 쿡방 힐링 예능이 트렌드다. 별것도 없는데 보게 되는 ‘삼시세끼’의 충격은 ‘윤식당’, ‘효리네 민박’, ‘섬총사’로 이어졌다.

정글 같은 경쟁 사회에서 바빠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머리를 텅 비우고 맛있는 거 먹고, 어린아이처럼 놀고, 게으름뱅이가 되어 쉬는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제대로 보여 준다.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는 건강이 필수이므로, 이는 지나친 건강주의가 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몸짱 열풍, 맛집 탐방 같은 것이 휩쓸고, 웰빙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더니, 지난 보수정권 9년간, 우리는 자조 어리게 헬조선과 탈조선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슬로우’와 ‘힐링’에 관심이 쏠린다.

일명 ‘슬로우 힐링 무비’라는 게 있다. 일본에서 영화 ‘카모메 식당’(2006)으로 시작된 열풍은 ‘마더 워터’, ‘안경’, ‘수영장’, ‘해피 해피 브레드’, ‘바닷마을 다이어리’, ‘하와이언 레시피’로 끝없이 이어졌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우리들의 행복한 순간’의 임순례 감독이 연출한 ‘리틀 포레스트’는 슬로우 힐링 무비의 본격 상륙을 알린다. 이 영화는 스토리라인보다는 4계절의 변화를 카메라에 담고, 자연에 적응해 가는 인물의 행동을 무심하게 따라간다. 그렇게 막바지에 이른 뒤 뒤돌아보면, 어느새 훌쩍 성장한 주인공을 보게 된다. 내면적으로 성장한 주인공을 그리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리틀 포레스트'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영화사 수박)

이 영화는 일본영화 리메이크다. 만화가 원작이고, 2014년과 15년에 걸쳐 2부작으로 개봉했다. 일본영화가 재료부터 요리까지 한 끼 만드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한 반면, 한국영화는 요리 과정에 스토리를 엮는다. 시험, 연애, 취업 등등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고향에 내려온 혜원(김태리)을 반겨 주는 건 어릴 적 친구인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이다. 재하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은숙은 고향으로부터 탈출을 꿈꾼다. 혜원은 친구들과 함께 직접 키운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겨울, 봄, 여름, 가을 사계절을 보낸다.

20대는 연애, 결혼, 출산, 취업, 집, 인간관계, 희망을 포기한 7포세대로 표현되곤 하는데, 이들은 반지하나 고시원에서 살며, 편의점에서 알바하고, 길거리 음식으로 때운다. 서럽고 처참한 이들의 처지는 한국 독립영화의 배경과 소재로 곧잘 활용된다.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일반적인 20대 청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조나 비하로 스스로를 내려놓지 않고, 농촌으로 들어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자생의 에너지를 찾는다. 그것은 어디서건 생존할 수 있는 야생성이다.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을 사계절을 예쁘게 담아낸 촬영, 우리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보여 주는 황홀함,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청춘들의 관계에서 오는 휴식과 위로에 한정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처절하게 깨지고 아픈 청춘의 문제를 개인 심리의 문제로 치환하는 오류를 낳는다.

'리틀 포레스트'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영화사 수박)

우리 모두에게는 잃어버린 야성이 있고, 그 야성을 회복할 작은 숲이 있다. 최악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혜원의 경우, 시험과 연애에 모두 실패하고, 엄마와는 연락이 닿지 않을 때), 폐허가 된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창조적인 야성을 어디에선가 일깨울 수 있다. 춥고, 덥고, 벌레가 창궐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선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농촌에서 혜원은 창조적 열정을 회복한다. 이 주체적인 여성이 보여 주는 끈질긴 회복력이 크나큰 위로를 준다. 단지 예쁘게 놀고, 맛있게 먹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영화 ‘와일드’(장 마크 발레, 2014)가 ‘리틀 포레스트’와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상실과 실망, 그리고 좌절을 이겨내는 과정이 조금 더 치열하고 진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엄마의 품을 떠나 홀로 서서 심리적으로 성숙해 가는 여성을 지켜보는 흐뭇함이 더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유배를 거친 후 방랑 끝에서 야성의 본능을 움켜쥐고 지혜를 터득한 멋진 여성 주인공이 주는 교훈이야말로 위로가 된다. 그러나 내 삶의 변혁은 나 혼자만의 심리적 변화로는 성취될 수 없다. 위축된 청춘들에게 진정 용기를 주기 위해서는 사적 세계로 몰입하는 나르시시즘적이고 탈정치적인 모나드 모델을 보여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꿰뚫는 지혜의 눈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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