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대화는 참된 사목적 의무

바티칸은 왜 중국 당국과 대화를 하고 있는가? 중국에서는, 종교에 적대적인 체제에 의해 수난을 받음에도, 가톨릭 신자들은 신실함을 유지해 왔다. 그렇다면, 이 대화는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는가?

(세르조 첸토판티, 베른트 하겐코르트 신부)

대화는 교회의 삶에 기본이다. 대화는 교회가 행동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요소로서, 그 자신의 구조들 안에서도 그렇고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사회, 종교, 그리고 문화들과 접촉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대화를 사목적 행동의 형태로 고려했는데, 단지 교회 구성원끼리만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 국가 당국, 그리고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현대세계의 사목헌장(‘기쁨과 희망’)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을 바로 건설하도록 힘을 합쳐야 한다고 진정으로 선언한다. 이는 분명히 진지하고 신중한 대화가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21항)

교황 바오로 6세는 그의 회칙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 1964)에서 다음과 같이 비슷한 말을 한다. “교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해 줄 말과 전해 줄 메시지가 있으며, 세상과 나누어야 할 대화가 있습니다.”(65항) “오늘날의 교회가 새롭게 열의를 다져 시작하여야 하는 대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교회 안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과도 기꺼이 대화를 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93항)

사람들, 기관들, 그리고 공동체들 사이에 대화를 하면 지식이 넓어지며, 이는 우의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경우에, 대화는 신뢰가 있어야 자라난다. 상호 신뢰는 작은 조치와 몸짓, 그리고 만남이 많이 쌓여 나오는 열매로서, 이러한 것들은 여러 다양한 때에 진행되는데, 조용히 그리고 불연속적으로 그런 경우도 많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7년 5월 13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닫히지 않은 문은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교황청과 중국 사이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화의 분위기는 근래의 여러 교황들이 취했던 여러 작은 조치들 덕분에 이뤄져 왔다. 이 교황들은 각기 통로를 열어젖히고, 새 디딤돌을 더하고, 희망에 찬 사고와 행동을 북돋았다. 바오로 6세의 조심스런 외교에서부터 베네딕토 16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명확한 지향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중국 정부와의 진취적인 대화를 고무했다. 가장 최근으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많은 민족, 국가 사이의 대화와 만남의 진전을 권고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도 포함된다.

중국과의 대화. (사진 출처 = Vaticannews.va)

가톨릭 교회는 대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가 선택하는 대화는 정치적 또는 외교적 이익을 얻기 위해 중요한 원칙들을 팔아넘기고 마는 이른바 “무조건 협상”이 아니다. 중국과 하는 대화의 경우에, 이는 중국의 가톨릭 공동체가 겪은 고난을 잊는다는 뜻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게는, 대화는 언제든 진실과 정의를 탐색함으로써 활성화되어야만 하고, 이는 인간의 온전한 선익을 성취하고 근본 권리를 존중하는 데 목표를 둔다. 교회의 사명은 중국에서라 할지라도 국가 조직 또는 정부를 바꾸려는 데 있지 않고, 또한 정치권력이나 당국에 도전하려는 데에도 있지 않다.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순전히 정치적 영역으로만 축소한다면, 교회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에서 어긋나서 수많은 정치적 주창자들 가운데 또 하나가 되고 말 것이며, 자신의 초월적 소명을 포기하고 자신의 행동을 오직 현세적 차원으로 축소하게 될 것이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대화하면 교회는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것에서부터 가톨릭 신자들의 합법적 기대를 보호하는 것은 물론 공동선을 촉진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된다. 이 상황 속에서, 교회가 중대한 발언을 할 때는, 그 목적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거나 단죄하는 데 있지 않고 건설적 기풍으로 더 정의로운 사회를 촉진하고자 하는 데 있다. 비평은 사목적 자비의 구체적 실천이 되는데, 약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반영되게 할 힘이 없는 이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을 반향하기 때문이다.

중국에 관하여 말하자면, 교황청은 정직하고 존중하는 태도의 대화가 설사 어렵고 또한 위험스럽다 해도 결국에는 신뢰있는 논쟁의 분위기를 촉진할 것인데, 이는 서로 더 잘 알게 만들며, 마침내 먼 과거, 그리고 조금 더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오해들을 극복하는 데 점차 성공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다양한 신호들을 보면 교황청이 국제적으로 행사하는 “부드러운 힘”(soft power)에 중국이 갈수록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역사가 계속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는 이들은 주의 깊게 식별할 필요가 있다. 교황청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중국 정부와 더불어 수행해 온 대화가, 시대의 징표를 읽는 데, 그리고 역사 안의 하느님 현존을 인식하는 데 몰두해 있는 이들에게 참된 사목적 의무가 되어 왔던 이유는 그것이다.

(이 글은 교황청과 중국 간의 대화에 관한 심층 기사 시리즈 2번째 글이다.)

기사 원문: https://www.vaticannews.va/en/world/news/2018-05/holy-see-china-diplomacy-mutual-tru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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