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백남기 투쟁 기록단

2015년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져 열 달여 투병 끝에 숨진 보성 농민 백남기(임마누엘).

백남기 씨를 기억하려는 이들은 올해도 그가 상경하기 직전까지 씨를 뿌렸다는 밀밭에서 추모 자리를 마련했다. "내가 백남기"라고 외쳤던 마음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동료들과 고향마을 사람들은 그의 밀밭을 지키며 밀농사을 짓고 그 밀로 백남기 농민이 했던 것처럼 먹거리를 나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백남기 농민이 원하던 세상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를 기억하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다시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고 되묻는다. 

그들은 백남기 농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있는 ‘백남기 투쟁 기록단’이다. 

기록단은 백남기 농민의 가족, 지인은 물론, 그가 쓰러진 뒤 함께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이 기록은 사건이나 '그 한 사람'에 집중한 이전의 기록과 달리, "기쁨과 슬픔, 분노를 나눈 이들의 이야기이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며, "어떤 식으로든 그 자신이 백남기였던 작은 사람들의 큰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백남기 농민 한 사람, 단수로서 백남기가 아니라 그와 함께 살고, 또 살고자 했던 수많은 백남기들의 이야기, 어떤 식으로든 그 자신이 백남기였던 얼굴 없는 이들의 큰 이야기를 듣고 적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통해 묻고 싶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그 약속을 우리는 어떻게 지키고 또 지키려고 하는지."

백남기 농민 묘 앞 '백남기 투쟁 기록단' (왼쪽부터)윤성희 작가, 박선아 씨(위), 정은정 작가, 최석환 국장. (사진 제공 = 투쟁기록단)

기록단, 각자의 방식과 마음으로 백남기를 지켰던 이들

올해 초부터 이 기록을 위해 모인 이들은 네 명.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직후부터 장례를 치르기까지 1년간 천막농성을 지키며 실무를 맡거나 사진으로 기록을 하거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미사 한 번 더 봉헌하자는 마음으로 천막을 찾았던 이들이다.

전농 대외협력부장이자 백남기 사건 당시 투쟁본부 사무국장으로 파견된 최석환 국장은 이 팀에서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다.

장례를 치르고 보성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길, 자신의 SNS에 “백남기 농민, 고맙습니다”라고 적었다는 그에게 백남기 농민은 “못난 후배가 정신 차리고 살게 해 주신 분”이다.

학생 때부터 농민운동을 고민했고, 지금까지 농민단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백남기 농민을 전혀 몰랐다. 2005년 두 농민이 집회에서 희생됐을 때, 그는 농민운동을 고민했던 학생이었고, 정확히 10년 뒤 백남기 농민 사건으로 현장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를 두고 그는 “백남기 농민 사건은 내 삶에 있어 필연”이라고 말했다.

사진 기록을 담당하는 윤성희 작가. 그는 그날 그 현장에 있었다. 백남기 씨가 쓰러졌던 종로의 그 길 앞에서 물대포를 맞으며 망연자실해 있던 그는 어느 순간 백 씨를 향해 너무 오래 퍼부었던 물대포를 기억한다. 노동전문 신문사 펜 기자로 현장에 갔지만 개인적으로 사진 기록을 해 왔던 그는 백남기 농민이 끝내 죽음에 이를지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쓰러진 백남기 농민의 피 흘리는 얼굴을 차마 찍을 수 없었다는 그의 첫 기록은 그때 찍었던 백남기 씨의 손이다.

그는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은 것은 갑작스런 우연이 아니었다. 사회적 맥락이 있었다”며, “농민들이 쌀값 21만 원을 보장해 달라는 생존 투쟁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백남기 농민에게 쏜 물대포는 정부가 농민과 농업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2016년 10월 25일 백남기 농민에 대한 경찰의 부검영장 집행을 막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 ⓒ정현진 기자

최 국장과 함께 팀의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는 박선아 씨(스텔라)는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사무국장이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일한 적이 있는 그에게 농민이자 가톨릭 신자인 백남기 씨가 쓰러진 사건은 곧 자신의 일이었다.

학생 때부터 운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한 적도 있지만, 결국 가장 힘든 순간에는 성당에 있었다는 그는, 처음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면서는, “왜 하필 농민이고 왜 하필 가톨릭 신자인가, 복잡한 심경이었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병원에서 늘 백남기 농민의 가족, 특히 ‘엄마’(백남기 농민 부인 박경숙 씨)를 챙겼던 박 씨는 “백남기 농민은, 부정했던 하느님을 다시 삶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을 부끄러워 했던 나에게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줬고, 내가 꿈꾸던 세상이 곧 하느님나라라는 것을 일깨워 줬다”고 말한다.

그는 백남기 농민 싸움을 통해서 농업과 농민의 현실이 비로소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주스 한 병을 사 먹게 돼도, 그것에 담긴 농업의 현실, 농부들의 손길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백남기 농민을 통해 많은 이들, 평범한 이들이 농민에 대해 내심 품었던 고마움과 미안함을 깨닫게 된 것 같다”며, “나 역시 미안한 마음으로 시작했고 가족들, 함께 백남기가 되어 준 모든 이들이 고마웠다”고 말했다.

농업사회학자이자 “대한민국 치킨전”의 저자, 정은정 작가. 농업과 먹거리를 연구하고 쓰는 그에게도 백남기 농민 사건은 먼 일이 아니었다. 그는 종종 어린 아들과 서울대병원 앞 천막미사에 들러 미사를 봉헌했다. 오랜 투병 끝에 사망선고를 받기 하루 전날은 백남기 농민의 칠순이었다. 생일 음식은 함께 나누고 살아 있을 때 미사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석한 미사가 결국 마지막 생미사가 됐다.

2016년 5월 14일, 백남기 농민의 집과 밀밭을 찾은 사람들. ⓒ정현진 기자

이름 없이 살고자 했던 백남기와 이름 없이 함께했던 수많은 백남기들의 이야기

기록팀이 정해 둔 이 인터뷰 기록의 부제는 “작은 사람들의 작고도 큰 이야기”다.

“아마 백남기 농민 살아 있을 때, 이런 책을 낸다면 펄펄 뛰었을 것”이라는 지인과 가족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를 고려했고, “2년 동안 함께 싸우고 곁을 지켰던 평범하고도 이름 없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아, 그들에게 헌정한다”는 가족들의 바람을 담았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시작해 9부 능선을 넘은 인터뷰에는 매일 빈소를 지키며 미사를 봉헌했던 사제와 수련수녀, 노동운동 활동가, 보성과 산청 농민회원, 광주진보연대 회원 등 단체 회원 가운데서도 단 한 번도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던 이들이 중심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고 이한빛 피디도 있다.

백남기 농민 장례가 치러지던 중에 열악하고 불합리한 방송제작 환경 문제를 제기하며 목숨을 끊은 이한빛 피디의 장례식장도 같은 서울대병원이었다. 비단 방송제작환경뿐 아니라 곳곳의 사회현실을 고민하고 함께 아파했던 그의 가족들은 그런 뜻을 알아 장례식에 들어온 물품을 백남기 농민 빈소로 올려 보냈다.

정은정 작가는 이 작업을 의뢰받고 가장 먼저 한국에 있는 웬만한 평전들을 읽어 내며 기록의 방향을 고민했다. 그는 “고인의 삶과 죽음을 보다 담담하게 적지 못했다는 것, 일상 생활에서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그들의 ‘평범함’이 묻혀 버리는 패턴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농민운동사만 봐도, 백남기의 죽음은 숱한 안타까운 죽음 중 하나였다. 그의 죽음만 주목해서 될 일이 아니”라며, “그의 죽음이 촛불로 이어지게 된 과정에서 함께한 많은 백남기들이 함께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터뷰도 크고 넓게 더 많이 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다양한 지역의 이야기도 함께 담았다. 전남 보성 출신의 농민이었고,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 일은 그 지역만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 작가는 “서울에서 싸운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지역 특히 호남 외 영남 지역의 이야기를 듣는다”며, “물론 작가의 관점과 사심이 들어가지만, 이 기록을 통해 각 지역, 다양한 이들의 잊혀져 가는 이야기를 복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의도는 사진 기록을 맡은 윤성희 작가의 렌즈에도 적용된다. 윤 작가는 “처음에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 남겨진 가족들을 위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며, “백남기 농민의 삶과 죽음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것은 함께 그 과정을 지켜 준 사람들이다. 그들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는 “먼저 인터뷰이의 초상과 그들이 살고 일하는 현장을 찍는다. 이렇게 평범하고 작게 살아가는 이들이 각자 백남기로 대변되는 가치를 지키려고 함께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다”며, “또 백남기 농민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의 집과 그의 자리, 집과 마을을 찍는다. 국가폭력이 소중한 한 사람을 빼앗아 갔고 그 빈자리가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자리를 남기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이 기록 작업의 의미가 있다면, 자칫 시간이 가면 잊혀지고 개인 차원에서 각자 묻어 두고 갔을 이야기를 복원하고 발굴하며,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2016년 5월 14일, 백남기 농민의 집과 밀밭을 찾은 사람들. ⓒ정현진 기자

죽음 아닌 삶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 어떻게 지킬 건가요?

또한 정은정 작가는 “백남기 농민을 잊지 말자고, 잊지 않겠다고 하지만 과연 그 약속을 어떻게 지킬 건가”라고 물었다. 

"우리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죠. 하지만 그가 일생을 걸었고, 죽기 직전까지 지었던 우리밀 생산과 소비의 문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어요. 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만 반응할까, 그렇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함께 싸운 이들을 기록한 거죠. 이 싸움을 기록하는 나,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묻기 위해서, 그리고 함께 한 이들을 잊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요.”

그는 세월호참사 이후에도, 정작 아이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는데 무엇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며, 잊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기억하기 위한 구체적인 약속, 구호가 아닌 시스템에 대한 답을 내야 한다."

특히 우리밀살리기운동과 관련, 정 작가는 “어렵게 살려 놓은 우리밀 문제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잊지 않겠다면 그 사람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밀살리기운동이 가톨릭 교회에서 시작된 만큼 특히 교회는 사목적 제시를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한 번에 전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중장기적 비전을 세울 수 있다. 이를테면 3년 동안 밀가루 소비를 우리밀로 몇 퍼센트 바꿔 본다든가, 그 다음은 계란 소비를 우리농 계란으로 바꾼다든가 하는 것”이라며, 이 정도도 못 한다면 희망을 말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백남기 투쟁 기록단의 이 인터뷰 기록은 올해 9월 2주기에 맞춰 백서와 함께 출간된다. 기록단은 "더 많은 이들이 이 기록을 만나고 어떻게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인지 생각하는 동시에, 위로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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