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60]

26개월이 된 다나. 이제 제법 말을 한다. 낱말 몇 개 조합하는 수준으로 하고 싶은 얘긴 거의 다 전달을 한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말로 일기라도 쓰는 듯이 며칠 사이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 주고는 하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다나야 코, 콩, 아야, 아빠 후후후, 엄마아~ 애앵앵, 뽀빠 흥! 딱지, 다나야 코, 콩 없다, 엄마 야호!"

이게 뭔 소리인가 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 그때 당시 상황을 최대한 상세하게 되살려 보겠다.

그러니까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완두콩을 한 바구니 따 와서 다울이와 분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울이가 일을 건성으로 하는 걸 보고 내가 화가 나서 잔소리를 퍼붓고 있는 와중이었다. 다울이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생 완두콩을 까서 다나한테 주며 "먹어"라고 했다. 다나는 옆에 누워 발장난을 하며 놀고 있다가 그 완두콩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다나가 벌떡 일어나 내 곁에 오더니 뭔가를 호소하는 눈빛으로 코를 가리켰다. 콧물을 닦아 달라는 얘기인가 싶어 손수건을 가져와 코를 풀게 했지만 다나는 그게 아니라며 신경질을 냈다. 콧구멍을 가리키며 계속 "콩, 콩" 그러면서 말이다. 그제서야 콧구멍 속을 들여다보니 완두콩이 보였다.

"엥? 완두콩을 콧구멍에 넣었어? 얼른 코 흥 해, 흥!"

다급한 마음에 몇 번이고 '흥!'하고 코를 세게 풀게 했지만 완두콩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속으로 넘어가 버렸나 싶어서 다나를 눕힌 채 콧구멍을 들여다보니 여전히 완두콩은 콧구멍 가장 깊숙한 데 있었다. 나올 생각도 안 하고 들어갈 생각도 안 하며 '메롱~' 약이라도 올리는 듯이 말이다. 순간, 지난해 다랑이 콧구멍에 완두콩이 들어간 일이 떠올랐다. 다랑이가 두 번이나 완두콩을 콧구멍에 넣어 큰 소동이 벌어졌었는데 그동안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기억하고 있었다면 다나한테 주의라도 줬을 텐데... 다나가 같은 짓을 되풀이할 줄, 그래서 이 끔찍한 악몽이 부활하게 될 줄 낸들 알았냐는 말이다.

아무리 해도 안 되길래 다나를 신랑한테 넘겼다. 신랑은 귀밥파개, 쪽집개, 빨대 등 온갖 도구들을 찾아 와서 갖은 방법으로 완두콩 빼내기 시술을 하느라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역효과가 나서 다나는 아빠가 자기 가까이 오기만 해도 울며 불며 난리를 쳤다.

"엄마아아~~ 으엉엉~~"

"이제 그만 좀 해요. 이러다 애 잡겠어."

"시간이 지나면 콩이 불 거 아니에요. 그러기 전에 얼른 꺼내야지."

"작년에 다랑이는 괜찮았잖아요. 그냥 놔 둬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땐 삶은 콩이고 이번엔 생콩이잖아요. 콩이 불어서 콧구멍 속에서 부피가 커지면 그땐 더 꺼내기 힘들 텐데 어쩌려구요. 콧구멍 속에서 썩을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려고요?"

신랑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때마침 친정 엄마한테 안부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는 물음에 사실대로 얘길 했더니 얼른 병원에 데려가라고 성화다. 한데 토요일 오후라 소아과건 이비인후과건 죄다 문을 닫았으니 어쩌랴. 그렇다고 콩알 하나 때문에 대학병원 응급실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친정엄마는 그렇게라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은 아이가 크게 불편한 기색이 없으니 기다려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시시각각 걸려 오는 친정 엄마의 전화(콩 나왔냐?)에 아직 안 나왔다는 무력한 대답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찜찜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잘 놀았지만 나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괜찮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다가도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듯 뛰었다. 시간을 되돌려 다나가 완두콩을 콧구멍에 넣기 직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럼 뭐든지 다 할 것만 같았다. 만약 완두콩이 무사히 다나 콧구멍에서 나온다면 매 순간 감사하며 정말 착하게 살겠다는 기도도 했다. 이 상황만 모면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릴 걸 알면서도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한순간도 기도를 멈추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깊이 뉘우치면서....

그때 신랑이 뭔가 다른 도구를 들고와 다나 콧구멍에 갖다 대려고 했다. 부항기에 들어 있는 고무 호스를 자른 것이었다. 그러나 다나는 싫다고 난동을 부렸고 신랑은 할 수 없이 옆에 있던 다랑이 콧구멍에 줄을 대고 시험 삼아 입으로 빨아들였다. 그런데! 다랑이 콧구멍에서 커다란 코딱지 하나가 쑤욱 딸려 나오는 게 아닌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는데 흡입력이 강력했다. 게다가 다랑이한테 코딱지 뺄 때 아팠냐고 물어보니까 하나도 안 아프고 간지럽기만 하다고 했다. 그래, 그렇다면? 다나도 바로 옆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기에 오빠처럼 하면 된다고 살살 얼렀다. 그런 다음 순식간에 호옥! 빨아들이자 완두콩이 나왔다. 야호 야호 만세! 온 가족이 정말 뛸듯이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다나도 환하게 웃으며 "야호! 야호!" 소리쳤다.

이것으로 완두콩 소동은 한낱 에피소드로 일단락이 되었다. 완두콩 한 알 때문에 마음을 졸인 걸 생각하면 이가 득득 갈릴 정도지만 그래도 완두콩은 여전히 우리 집에서 사랑받고 있다. 날마다 막 따서 껍질째 쪄 놓으면 아이들 손이 부지런히 오고 간다. 다울이가 "음~ 바로 이 맛이야!" 하면서 먹으면 곧이어 다랑이가 "음~" 하고 마지막으로 다나까지 "음~" 감탄하면서 먹는다. 완두콩 소동이 일어나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완두콩이 맛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아이들이 꾸민 못난이완두콩빵과 완두콩잼. 완두콩잼은 찐 완두콩에 물, 소금, 설탕만 넣고 갈아 만드는데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정말 맛있다. 맛도 맛이지만 야광연둣빛 색감이 예술! ⓒ정청라

덧.

신랑은 다나 완두콩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콧구멍에 들어 있다 나온 완두콩을 냉동실에 고이 넣어 두었다. 올해 그 콩을 꼭 심어 보겠다면서... 나는 나대로 다나 콧구멍에서 자란 완두콩이 넝쿨이 하늘나라 거인의 집으로 뻗어 올라간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 주며 그날의 소동을 상상력의 원천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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