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삶 - 송승연]

‘관리’의 객체가 아닌 ‘권리’의 주체로서의 정신장애인을 위하여

1960년대 시작된 탈시설화는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나진 않았다. 60년대에도 프랑스는 기존 시설의 과밀을 해소하기 위해 정신병원을 더 구축할 계획이었고, 이탈리아도 70년대까지 정신병원 20곳이 각각 1000명이 넘는 환자를 수용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오히려 50년대 54개이던 시설 수가 1981년 109개로 2배가 되었으며, 사민주의 정권이었던 스웨덴과 덴마크에서도 정신병원 입원자수는 70년대 내내 증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모든 국가는 탈시설화하였다. ‘탈시설화’라는 열차에 모두가 탑승할 동안 거의 유일무이하게 일본과 한국은 탑승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약 50년의 시간이 지나서 일본은 뒤늦게 승차하였고, 많이 늦었지만 우리나라도 이제 막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지역사회 인프라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탈시설화는 장밋빛 미래만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충남 서천군에 있던 정신질환자 수용시설 장항수심원은 1997년 ‘그것이 알고 싶다’에 의해 심각한 인권유린 사태가 드러났고, 결국 폐쇄되었다. 장항수심원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2016년 ‘그것이 알고 싶다’는 청년 수용자 75명의 삶을 추적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안타깝게도 이미 사망(자살, 병사, 고독사, 행방불명 등)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충청 인근 정신장애인 관련 시설에 재수용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들은 상황이 다를까? 사회학자인 앤드루 스컬의 ‘광기와 문명'(2017)을 보면, 미국은 1960년대 말 ‘위대한 사회’ 계획으로 인해 퇴원한 정신장애인에게 약간의 급여를 연방예산으로 제공했다. 이에 주정부는 예산절감이라는 목적하에, 지역사회 예산을 확충하지 않은 채 탈원화를 진행하였다. 결국 퇴원한 정신장애인은 노숙인이 되거나, 영리시설에 집단으로 재수용되었다. 영국 또한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탈원화 이후 1970년 예산을 조사해 보니 여전히 시설 내 정신장애인에게는 3억 파운드(약 5000억 원) 예산이 책정되어 있었으나, 지역사회 내 정신장애인을 위한 주거, 사회복지서비스 등에 사용된 예산은 650만 파운드(약 100억 원)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들은 지역사회 정신건강서비스에 예산을 투자하지 않거나, 주거 혹은 직업과 같은 사회적 자원이 없다면 ‘시설화’에서 ‘탈시설화’를 추진한다고 해도, 결국은 ‘재시설화'(reinstitutionalization)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배제(사회구조적으로 실업, 저소득, 취약한 주거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가 조합되어 사회의 주류적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는 상태)와도 연결이 된다. 시설화 구도에서는 가시적으로 드러난 억압이, 재시설화 구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벽의 확장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지역사회 인프라가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탈원화는 시기상조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 ‘무적의 논리’ 앞에서 시간을 하염없이 날려 보냈다. 그 어떤 정책도 완벽한 준비와 동시에 시행될 수는 없다. ‘정신병원이 없는 국가’로 알려진 이탈리아 또한 탈원화와 동시에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이 시작되었고, 2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는 이제 막 탈원화 열차에 올라탔다. 먼저 나아간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타산지석, 반면교사 삼아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과 이탈리아는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정신장애인을 일제히 퇴원시켰으나 그 이후가 달랐다. 미국은 지역지원서비스가 정비되지 않은 가운데 많은 사람이 노숙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탈원화 이후 지역에서의 아웃리치 서비스와 커뮤니티 케어 체제를 서서히 정비하고 확충하였다. 특히 ‘일’과 관련된 이탈리아 서비스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주거가 우선 제공된 뒤 안정적으로 주거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개인적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려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진 출처 = geograph.org.uk)

정신장애인 고용을 위해 이탈리아는 ‘사회적 협동조합’ 활성화 전략을 사용했고, 이를 통해 정신장애인의 시민권 회복과 사회적 재통합을 도모했다. 또한 제도적, 정책적 보완이 동반되었는데 1991년 법률381(사회적 협동조합의 규정)을 통해 장애인 고용의무(최소 30퍼센트)와 장애인의 일자리 제공을 위한 사회적 협동조합 세금공제를 보장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협동조합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사회적 협동조합은 초기에 지방정부 사업을 아웃소싱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협동조합은 궁극적으로 정신장애인 자립과 더불어 가족의 돌봄 부담을 줄여 줬고, 더 나아가 지역 경제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집’과 관련된 것으로, 미국의 노숙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한 ‘주거우선 정책'(Housing First)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언어 그대로 ‘주거’ 제공이 최우선이라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주거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건강 혹은 음주, 고용 등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가디언>(2014. 10. 20.)에 따르면 2010년에 주거우선 정책이 시행된 뒤 미국 전역에서 노숙인 수가 전반적으로 줄었다. 유럽 또한 비슷한 사업인 ‘Housing Led’가 시행되었고, 핀란드, 덴마크, 스코틀랜드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이끌어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주거가 먼저 제공된 뒤 안정적으로 주거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개인적 문제(정신건강, 실업, 중독 등)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려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주거우선 접근법은 타 복지서비스에 비해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는 부담이 있다. 또한 정신건강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주거를 지원해 준다는 것 자체에 부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어쩌면 감정적인 것으로 극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관련 데이터는 명확한 성과를 보여 준다. 진정한 지역사회통합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주거우선 접근의 도입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탈원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양한 제도에 대한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최근 이슈로 떠오른 것은 ‘외래치료명령제'(Community Treatment Order)로,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강제 통원치료를 받게 하는 제도다. 폐쇄병동에서의 치료가 아니라 지역사회 내 치료이기 때문에 나아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2가지 측면에서 우리는 고민을 해 봐야 한다. 첫째 ‘강제적 치료’와 ‘자발적 치료’의 차이점이다. 강제적 치료 경험은 지각된 강요(perceived coercion)를 증가시켜 오히려 치료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지적이 있다. 자발적으로 치료에 참여하는 것이 아마도 정신장애인 당사자 회복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 앞서 언급한 주거우선 접근은 정신장애인이 약물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있다.(Rezansoff et al., 2016) 

둘째 외래치료명령제는 여전히 정신장애인을 ‘관리’의 대상으로서, 동시에 수동적인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사자의 욕구와 자기결정권은 많은 부분 배제된다. 탈시설화 패러다임 전환과 더불어 정신장애인을 권리의 ‘주체’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200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개인 예산제’는 당사자의 욕구를 반영하여 서비스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다.(Ridente & Mezzina, 2016) 10년간 변화를 살펴보면, 보다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지원주택’으로 예산이 대거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당사자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 주는 사례다. 뉴욕에 있는 주거지원재단인 CHS는 2014년 다음과 같은 제목의 자료집을 출판했다. ‘주거가 최고의 약이다!'(Housing is the Best Medicine) 단순히 눈에 보이는 쉬운 선택보다 우리는 보다 천천히 나아가더라도 본질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본질은 사회적 구조, 그리고 ‘집’은 그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송승연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박사 수료.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 운동세력으로 확장되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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