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안태환] 한국 촛불은 근대성에 머물러

요즘 폭염으로 너무 힘들다. 필자는 멕시코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오래 체류한 경험이 있어 그곳의 더위 수준을 잘 안다. 멕시코 북부는 여름에 45도 정도까지 올라갈 때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더 덥다. 그곳은 건조하므로 그늘에만 가도 덥지 않고 밤에는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최근 전기요금 할인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멕시코는 여름에 아예 전기요금을 할인한다. 그리고 멕시코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저소득층에는 전기요금이 차등 할인되는 제도가 있다. 

우리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 근대성(이성, 발전, 성장, 과학기술, 정치적 민주주의, 진보, 시장, 상품생산)에 매몰되어 왔다.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이번 폭염은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므로 아파트를 그만 짓고 나무를 많이 심고 자동차 운행을 줄이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석탄발전을 줄이자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느냐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서울시장이 여의도를 미국의 맨해튼처럼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우리가 얼마나 미국식(유럽식) 모던한 라이프스타일을 선망하는지 알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90년대부터 중요한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 주고 있다. 지식인과 대중 모두 신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분명하다. 우리는 극소수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다.

1990년대 초반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들로 이루어진 그룹은 신자유주의(자본주의)가 약자를 배제하는 것의 뿌리가 유럽이 비유럽을 처음 만난 즉, 콜럼버스의 1492년 라틴아메리카 정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16세기부터 비유럽의(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와 철학, 세계관을 유럽보다 아주 아래에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유럽의 자원과 노동력을 유럽(자본주의)의 입맛과 이익에 맞게 “위계서열적 차별적 구조” 안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를 곧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둘에는 근본적으로 ‘강자, 약자를 나누는 위계서열에 따른 차별, 억압, 폭력’ 즉, 식민성이 내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럽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식민성을 은폐해 왔고 이 식민성이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르러 폭력성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비판이다. 우리 사회의 ‘헬조선’도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식민성인 것이다. 유럽인들은 식민성이 철학적, 인식론적으로 당연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식민성의 인식은 유명한 철학자인 칸트와 헤겔에게서도 발견된다. 또한 식민성이 당연하게 된 근거들 중의 하나가 가톨릭의 신화적 담론이다. 5세기 초반에 아우구스티노는 "신국론" 제16권에서 “노아가 말하길 ”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러나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하느님께서는 야펫에게 자리를 넓게 마련해 주시고 셈의 천막들 안에서 살게 해 주소서.“ ....이 이야기에 담긴 다른 모든 사건은 예언적 의미들을 품고 있으며 예언적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파생된 대중적 신화는 야펫은 유럽, 함은 아프리카, 셈은 중동을 암시한다. 인종주의적 편견이 나오게 된 것이다.

멕시코 시티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 사회에서 최근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예멘 난민에 대한 차별, 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차별과 폭력도 식민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식민성은 학교 교육과 미디어의 영향을 받으며 일상생활의 상식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되므로 19세기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가 실행한 제도적 법적 억압인 식민주의와 개념이 다르다. 이 식민성이 16세기부터 시작된 근대성의 동전의 뒷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근대성이 18세기 계몽주의, 종교개혁, 산업혁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매우 낯설고 비주류적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미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담론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수준을 넘어 동물권과 자연의 권리까지 인정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런 해방을 위한 실천의 최선봉에는 500년 동안 유럽인과 그 후손들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당한 원주민들이 주체로 나서고 있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에서 오랫동안 최약자였던 원주민들이 에콰도르에서 집단적으로 1990년에 격렬한 시위를 통해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에 대등한 사회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 학자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하는 역사적 분기점을 맞을 때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방식의 배치 또는 재배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2차대전 이후 냉전시기에는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로 배치되었고 1990년대 이후의 글로벌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국경을 넘어 소수의 이익과 다수의 배제라는(소위 1 대 99)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다른 말로 전 지구적 북부와 남부의 전쟁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구 온난화를 포함하여 현재 우리가 겪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심각한 문제들은 이제 더 이상 근대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한다. 약 천 년의 근대문명은 최종 말기에 이르렀고 이제 역사적(문명적) 대전환이 요구된다고 한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촛불 혁명 이후에 적폐청산, 공정한 경제, 재벌개혁, 소득주도 성장 등 근대성의 범주 안에 머물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대안은 식민성에 의해 근대 이후 억압되고 배제된 타자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란 상식적으로 우리와 다른 문화, 사고방식, 가치관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런 맥락이 아니라 우리보다 위계서열이 아래에 있다고 즉,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약자가 타자다. 예를 들어, 프랑스나 독일에서 온 난민이 있다면 이들은 타자가 아니고 예멘 난민은 타자가 된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철학자로 평가되는 엔리케 두셀은 스스로가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때 멕시코로 망명한 난민이다. 그는 현재 멕시코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두셀에 의하면 “타자는 희생자인데 주변부의 식민세계, 노동자, 원주민, 노예가 된 흑인, 억압받는 여성, 식민 시대의 아시아인 피착취자, 비백인 인종, 생태 파괴로 인해 그들의 육체성이 고통받을 미래 세대, 소비주의 사회의 갈 데 없는 노인, 길거리의 버려진 아이들, 외국인 난민 이주자, 소외된 민중 문화 등이다.”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현재 한국외대 스페인어과에서 중남미의 역사와 정치, 사회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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