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슬픔을 위한 시간”, 박정은, 옐로브릭, 2018.

지난 3월 아빠를 잃었다. 피붙이의 첫 죽음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애도해야 한다”는 명제에 내내 시달렸다. 그동안 숱한 죽음과 상실의 현장을 보면서, 애도라는 말을 많이도 썼지만, 정작 나의 일이 되었을 때, 나에게 애도를 위한 시간과 공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물리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빠에 대한 기억이 문득문득 소환될 때마다 나는 서둘러 다시 묻어버렸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 죄책감, 뒤늦은 후회, 안타까움 등이 뒤엉킨 감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또한 두렵기도 했다. 아빠를 제대로 보내 주지 못한다면, 그 남은 감정들이 모르는 사이 나를 잠식하는 것은 아닐까. 애도조차 나를 위해서 하려 한다는 죄책감이 얹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100일이 흘렀다. 다시 찾은 아빠의 묘 앞에서 아빠를 부르고 싶었지만, 더욱 슬퍼하는 엄마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반가운 만큼 책장을 펼치기 어려웠던 이유였다. 오래 망설이다가 책장을 연 것은, “죽은 이가 남긴 것을 안고 살아내는 것”이라는 애도에 관한 어떤 글 때문이었다.

저자 박정은 수녀 역시 이 책을 쓰는 동안 절친한 동료 수녀의 암 투병을 함께했고, 이 책을 마무리할 때쯤 그녀를 떠나보냈다.

이 책은 단순히 애도의 방법론이 아니다. 지인들의 고백,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이별과 상실, 죽음을 겪었던 이들이 어떻게 그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왔는지 듣고, 나누고 함께 길어 올린 생생한 기록이자 속 깊은 조언이다.

책은 먼저 우리가 과연 살면서 어떤 상실을 겪고 있는지 살피고, 이러한 상실을 애도하는 과정을 몇 개의 이론을 통해 설명한다. 또 상실이 깊고 충격적인 상처로 남은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상실의 슬픔을 통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등을 짚고, 이 모든 과정에서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소개하면서, 상실의 고통을 지나는 이들의 곁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도 일러 준다.

"슬픔을 위한 시간", 박정은, 옐로브릭, 2018. (표지 제공 = 옐로브릭)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상실’은 우리가 태어나 숨 쉬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언제든, 어디에든 어떤 형태로든 우리와 함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늘 인식하고 사는 것은 아니라면서, 우리 자신이 겪는 ‘상실’이 어떤 것인지 짚고, 이들에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을 때, 그 경험을 주체적으로 만나 고유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상실은 나와 타인, 나와 어떤 대상 사이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관계를 맺던 이들과의 헤어짐이나 관계의 변화, 고향과 같은 익숙한 공간에서 떠나옴, 가까이 있던 이들의 죽음 등 관계 안에서 겪는 상실 외에도 실패, 자기혐오, 사회적 지위의 상실, 나이듦과 병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 이념과 가치의 상실 등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맥락 안에서 겪는 자아의 상실”도 있다.

작가는 사회적 통념 안에 있는 상실 외에도 “관습상 인정되지 않는 관계 안의 이별이나 단절,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정치나 이념에 따른 상실, 상실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약자나 주변인들이 소외되는 경우, 범죄자나 반사회적 인물과 그 주변인들이 제대로 애도할 수 없는 상황, 특수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경험 등도 반드시 짚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상실은 애도, 혹은 슬퍼하기라는 자연스럽고 불편한 과정을 수반합니다.... 이것은 상실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가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상실한 인간은 슬퍼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지만 필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이 없다면 누구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애도, 슬퍼하기의 과정에 대한 세 가지 이론을 설명하지만, 상실에 대한 반응과 적응 과정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어떤 단계들은 정확히 구분할 수 없는 혼재된 상태로 드러난다는 개별성도 잊지 않는다. 또 모든 과정은 중시되어야 하고, 서두르지 않아야 하며, 아픔과 불편함을 보듬은 부드러움과 인내심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특히 우리가 경험하는 상실은 전적으로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놓인 사회구조를 분석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새로운 관점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보내주기와 맞이하기

이 책의 핵심은 상실에 따른 슬픔을 '보내주기'와 '맞이하기'다.

저자는 상실의 슬픔에 계속 머물러 있거나 상실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병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고 슬픔을 딛고 변화와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내주기(let it go)와 맞이하기(let it come)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보내주기’는 내면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주제나 이슈를 떠나보내는 마음의 태도, ‘맞이하기’는 그것을 잘 보내주고 극복한 뒤, “상실의 체험 혹은 그로 인한 슬픔이 다시 나를 찾아와도 좋다는 자세”라고 설명한다.

“‘보내주기’의 핵심은 특정 상황이나 경험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는 것, 즉 상실 체험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떨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결국 자신과 체험 사이에 약간의 틈을 만들어서 그것이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인지 밧줄인지 구별할 수 있는 관점, 혹은 시각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맞이하기’는 “상실 체험을 건강하게 보내준 뒤에 그 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자유”다. 저자는 대부분 ‘보내주기’까지의 단계를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언제든 그 상황을 다시 맞이할 수 있다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어떤 상실의 경험이든 진정한 보내주기가 이뤄지려면 마음속에 그 경험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더 바라보아야 할 어떤 상실의 경험을 예쁜 상자에 넣어 그곳에 묻어 둔다고 상상해 봅시다. 언제든지 편안한 나만의 장소에 와서 그것을 꺼내 볼 수 있게 말입니다. 억지로 상자에 구겨 넣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실이 가져다 준 슬픔과 아픔, 실망, 분노들을 잘 보듬어 소중하게 보관합니다. 나중에 다시 열어 보면 미처 보지 못했던 위로나 새로운 의미가 담긴 메시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내주기와 맞이하기가 동시에 자유롭게 이뤄지는 공간을 저자는 ‘임계 공간’ 혹은 ‘틈새 공간’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이 공간이 있을 때 비로소 삶은 생명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이 임계 공간이 커질수록 마음과 생각은 탄력적이 되고,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여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성탄의 구유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 깃든 부활의 신비를 만나는 그런 공간이 임계 공간입니다.”

박정은 수녀는 책의 말미에, “(상실을 품는 일)은 우리 자신이 슬픔 속에서 완전히 용해되어 버릴 때 진정한 새 생명이 돋아나기 때문”이라며, “중요한 것은 어설픈 싸구려 희망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품는 일”이라고 간곡히 말한다.

상실 없는 삶이 있을까. 상실을 겪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삶의 여정은 어쩌면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겪어내고 극복하려는 노력의 과정일 테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성찰하며, 다시 그의 부활을 살아내려는 이들이 아닌가.

내 삶은 늘 변하고, 그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어쩔 수 없는 이 상실을 우리가 어떻게 품어 안고 성찰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책으로 비로소 내 큰 상실의 슬픔을 마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길이고, 나만의 속도일 것이다. 그 여정에 더 많은 이를 초대하고 함께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내 아버지를 애도하는 길이며 나의 슬픔을 잘 보내고 또 맞이할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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