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오늘부터 매월 둘째 월요일마다 홀리네임즈수녀회 박정은 수녀의 [신학 오디세이아 2]가 연재됩니다. 4년 만에 다시 연재를 시작해 주신 박정은 수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여름이 되면 난 한 달가량 한국에 머무른다. 여름방학이 3달 정도 되는 미국의 대학 시스템 속에서 여름이란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떠나, 연구도 하고, 쉬기도 하며, 자기 충전을 하는 특별한 시간이다. 내게 있어서 한국에 머무는 이 한 달여의 시간은, 연구 주제를 찾을 뿐 아니라, 일 년을 두고 성찰할 주제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시장에서, 혹은 거리에서, 혹은 동네의 찻집에서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누군가가 내게 던지는 의미와 질문들은, 이제 천천히 내 안에서 기도가 되고 또 영적 숙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여름에 날씨가 덥다든가, 혹은 공기가 나쁘다든가 하는 것은 내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워서 지구온난화가 현실이 된 것 같은 염려와 두려움이 앞선 것도 사실이지만, 슬픔과 기쁨의 삶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을 줄어들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일찌감치 공항에 가, 편안하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 이번 한 달 동안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보면서, 생의 의미를 한 수 가르쳐 준 그들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한다. 그들은 잘 아는 이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름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때로는 친절한 웃음이기도 하고 때로는 거칠고, 나로서는 원인 모를 적대감이기도 하다. 여하튼 모두 감사하다. 그들은 나의 마음을 만졌고, 내 맘 속에서 또 생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어떤 빛깔과 결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이번 여름 다가온 여러 번의 감동적인 순간들이 “이방인”과 관련되었음을 발견했다. 세계화되어 가는 이 세상에서, 준비가 되어 있든, 아니든,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될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닐 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방인의 범주 중에도, 난민은 얼마나 서툴고 익숙지 않은 단어인지. 이번 여름 내가 만난 예멘 난민과 관련해서 내 맘에 계속 맴도는 이미지는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의 연작 판화, “미제레레(Miserere: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기아, 병, 외로움으로 고통받았던 20세기의 서글픈 현실에서 수난하는 예수를 보았던 그는 모두 58점의 판화를 제작하고 부제를 붙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제들을 좋아해서 사순시기에는 14처 대신 묵상하곤 한다. 그는 전쟁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에 대한 묵상으로 16번 작품에 “불쌍한 난민이 되어 네 마음을 향해 걸어오신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냉전시대가 끝난 오늘, 자본주의의 폭압 속에 여전히 사람들은 전쟁을 경험하고, 낯선 곳으로 이주하며, 또 엄청난 빈부 격차 속에서 비참한 가난을 목도하게 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루오가 만났던 세상과 닮았다.

사실 오늘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땅에 정착한다. 전쟁, 가뭄, 환경의 파괴, 그로 인한 기아와 실직,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없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에게 익숙한 환경을 떠나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떠나간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 왔고, 그 옛날부터 소위 “남의 나라에 몸붙여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가 낯선 이를 받아들임으로 인해 겪게 될 어떤 손해도 감수하고 싶지 않기에 국경 문을 꼭꼭 닫는 데 있다.

조르주 루오, '미제레레 : 여기서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 세계가 탄생했다'. (이미지 출처 = https://blog.naver.com/jrkimceo)

그러기에 이 주제는 늘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며, 더구나 한국에 이 문제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다가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 당황스럽기까지 한 것 같다. 이미 외국인 노동자들을 알고, 농촌의 남성들이 베트남,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같은 외국 여성과 결혼해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감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저 눈을 감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 내전으로 인해 내몰린, 낯선 모습을 한 예멘 사람들이 제주에 도착했고, 그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도전장을 던졌으며, 여기저기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근거 없는 신경증적인 두려움을 우리는 포비아(phobia)라고 한다.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가 잘 모르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어서 일까?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과 두려움은 서구 유럽에 깊이 자리잡은 감정이다. 그런데 이슬람과 별 접촉이 없던 우리에게 어디서 이런 정서가 오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타자에 대한 두려움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눌려 온 우리 역사가 제공하는 정서일까? 아니면, 이것도 우리가 좋아하는 서양사람들 것이라 흉내 내고 싶은 건가? 그도 아니면 서구가 제공하는 혹은 해석한 정보에 우리는 그저 맥없이 반응하는 건가?

그런데 성서는 확실히 이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 신원이 불확실하고, 고향이 다른, 그래서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알 수 없는 타자를 환대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도 나이 칠십 이후에 하느님이 보여 주신, 그래서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길이 아닌, 보여 주실 땅을 향해 떠났던 사람이어서 였을까? 그의 환대는 너무 극진하여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런 비정상적인 환대만이 인간이 하는 유일한 시적인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남의 땅에 몸붙여 사는 이방인으로서, 나에게 미국 문화를 가르쳐주고, 친구가 되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들의 관대함과 친절은 내게 하느님의 자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그 이방인들을 한번 만나보고, 따스함을 나누고 싶었다. 마침 제주의 어느 성당에서 나는 예멘에서 온 두 분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랍어밖에 못하는 그들과 아랍어를 모르는 나는 구글 번역기와 인간 공용어인 손짓, 발짓에 의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귀에 노래처럼 들리는 언어 속에, 그들의 아픔과 슬픔이 절절히 배어 나왔다. 알리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는 아직도 귀에 아빠를 외치던 , 소식을 모르는 딸의 목소리가 쟁쟁해서 잠을 들 수가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울지 않았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진다고도 했다. 다른 한 청년은, 한국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라며, “저를 무서워하지 마세요, 저 무슬림이에요” 라고 했다. 그가 무슬림이라고 말하던 순간, 그의 얼굴에 비치는 자부심, 자긍심이 느껴졌다. ‘참, 이슬람이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란 뜻이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슬람인은 평화로운 사람들이라고 믿는 그에게 이슬람공포(Islamic Phobia)를 차마 이야길 할 수 없어서, 그의 무구한 표정과 마음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어서, 그저 그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난 그 두 분의 깊은 슬픔에서 나는 맨발 거지로 내 맘을 걸어 들어오시는 예수, 그분을 뵙는다. 그리고 이태원 중앙성원에 옹기종기 모여서 초라한 밥을 먹고, 쿠란을 읽는 동남아 혹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온 많은 사람들의 연약한 모습에서, 다시 그분을 뵙는다. 글로벌한 가난, 전쟁의 공포와 자연 재해로, 혹은 어떤 이유에서든 이방인이 되어 우리 맘에 걸어오시는 그분을 경배하고 싶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4.3 때 제주를 떠나야 했어요. 갈 곳 없이 내몰린 이들은 배를 타고 일본 오사카에 가서 정착했어요. 우린 그런 경험이 있으니, 그 사람들 도와야 해요”라는 제주의 한 어른에게서, 난민 센터에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 왔다며 휴지를 내밀던 어느 여인, 그리고 난민들에게 다가가 한글을 가르치는 이름 모를 봉사자들의 열정과 인간애에서, 난 이 시대의 고통 한가운데 탄생하는 새벽의 따스한 빛을 본다. 루오가 “수난에서-여기서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 세계가 탄생했다”라고 어떤 작품에서 이야기하듯이.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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