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년 저널리즘 세미나 2 - 박준영 발표, 조현 토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한국 교회를 있는 그대로 쓴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으로 교회쇄신을 지향해 왔습니다. 창립 10주년을 맞아 내일 더욱 충실한 언론이 되기 위해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세미나는 9월 12일(수)에 박준영 편집국장의 발표, 조현 기자(<한겨레>)의 토론과 독자들의 질의응답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언론이 가야 할 길을 함께 고민하면서 깊이 있는 토론을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발제문과 토론문, 2가지를 아래와 같이 더 많은 독자와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박준영 편집국장(왼쪽)과 조현 기자. ⓒ달군

발제 : 가톨릭 저널리즘에 관하여 

-필요성을 중심으로

박준영,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저널리즘”(Journalism, 언론)에 대해, 미국신문협회(API)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널리즘은 뉴스와 정보를 수집, 평가, 창조하고 제공하는 활동이다. 또한 이런 활동의 산물도 저널리즘이라 이른다. 저널리즘은 특정한 성격과 실천관행으로 다른 (정보 관련) 활동이나 산물과 구분될 수 있다. 이런 요소로 인하여 저널리즘은 다른 형태의 커뮤니케이션과 분리될 뿐 아니라, 민주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다.”(주1)

또한 “저널리즘”은 더 좁게는 “저널리즘 정신”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저널리즘의 어원인 “날마다 기록”에서 비롯한 여러 보도 원칙과 이를 지키려는 활동, 자세를 말한다. 이는 위 API처럼 “다른 활동과 구분되는 저널리즘의 특정한 성격과 관행”이라 설명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용법이다.

그리고 API는 이러한 특정한 성격과 관행의 요소들, 즉 저널리즘의 요소들(The elements of journalism)(주2)을 다음과 같이 들고 각 항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글에서 “저널리즘 강화”를 말한다면 주로 이러한 뜻이다.

 

1. 저널리즘(언론)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에 충실하는 것이다.

2. 첫째가는 충성 대상은 시민이다.

3. 핵심은 엄정한 검증(discipline of verification)이다.

4. 실천자는 자기가 보도하는 대상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해야만 한다.

-독립은 신빙성의 초석이다.

5. 독립적인 권력 감시자로서 봉사해야만 한다.

6. 공적 비판과 (공적) 타협이 이뤄지는 포럼 공간을 제공해야만 한다.

7. (기사가 어떤 문제에 관해) 의미 있게 관심이 가고(interesting) 관련성을 유지하도록 분투해야만 한다.

8. 뉴스가 포괄적(comprehensive)이며 (비례적) 균형이 잡히도록 해야만 한다.(지도처럼)

9. 실천자는 자신의 개인적 양심을 따르도록 허용되어야만 한다.

10. 시민들 또한, 뉴스에 관한 문제라면 권리와 책임을 지닌다.

 

저널리즘은 또한 언론산업이나 언론기업, 간행물 등과 같은 구체적 존재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출판 저널리즘은 (신문, 방송을 제외한 잡지, 도서 등) 출판산업, 출판물 등을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저널리즘”을 이런 용법으로는 잘 쓰지 않고 그냥 “종교 언론”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이 글에서도 이런 용법이 혼용된다.

 

1. 가톨릭교회와 저널리즘

“가톨릭 저널리즘”은 어떤 이에게는 처음 들어도 당연한 듯 들리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익숙하여도 불편한 말이다. 그것은 “저널리즘” 앞에 붙는 “가톨릭”이라는 수식어가 본체인 “저널리즘”의 본질을 어떤 형태로든 간에 훼손하는 경우다. 그래서인지 언론계에는 심지어 “가톨릭 언론”은 엄밀히 봐서 “언론”(journalism)이 아니라고, 그런 수준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주3) 가톨릭교회의 언론에서는 (당연히) 저널리즘의 원칙들을 지키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가톨릭교회 안의 언론은 가톨릭 언론이니 당연히 “가톨릭 저널리즘”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와 세상은 한 세상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상에 속한 긴장 관계에 있고, 교회는 세속과 달라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가 기계적으로 이해되어 “언론”에도 확장 적용되는 것이다.(주4) 이때 “저널리즘”은 “가톨릭”의 세례를 받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세속”의 물건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가톨릭”의 물건이 되기 위해서는 가톨릭적 변용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고 증명하는 가장 쉬운 장치가 “가톨릭”임이 분명한 성직자에 의한 통제다. 또한 “가톨릭”이므로 그 보도 내용에서도 교회 안의 내부 소식에 국한되었다.

제도교회가 발행, 통제하는 기존 언론들은 무엇보다도 기사 주제의 선택에서 큰 제약을 받았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새로 나온 언론은 이 문제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기사 주제를 확대하거나 주요 주제를 변경하는 데 중점을 뒀고, 이것이 기존 매체와 다른 차별성, 정체성처럼 되었다.

이것은 교회 저널리즘으로서는 상당한 진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주제의 확대라는 1차 목표를 “저널리즘” 그 자체/성취와 동일시할 수 있다. 관심 주제만 다른 채 언론을 스피커로 바라보는 제도교회의 관점과 얼마나 충분히 이별하지 못하면 방향만 다른 스피커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 전진해야 한다.

 

1) 가톨릭에서 저널리즘은 발달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가톨릭 저널리즘에는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어찌 됐건 그간 “가톨릭”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매달리다 보니 막상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서 발전이 안 됐다는 점이다. 이는 본말이 뒤집힌 것이다. 가톨릭계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때 “가톨릭 진화론”을 가르치느라 막상 진화론에 대한 설명이 부실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언론”이라는 단어와 거의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공정”, “객관”을 생각해 보자.

기존 가톨릭 언론은 공정과 객관을 거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이들이 언론 보도에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무시하는 무개념이라는 뜻이 아니다. 가톨릭교회에는 이미 2000년의 역사에 걸쳐 확고히 증명된 진리와 교리가 있다. 이것을 전하는 데 새삼 공정과 객관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 가톨릭언론에 대해 “공정”이 문제가 될 때도 주로 기사 주제가 한정된 것, 달리 말해 다른 특정 주제가 배제된 것의 문제와 동일시되었고 더 깊은 차원은 인식, 개발되지 않았다.

또한 “객관”은 (대학과 같은 학계 안에서의 학술적 토론은 예외로 하고) 이미 합의된 것만을 알리고 선포하는 가톨릭교회의 특성상, 이 신앙과 관련된 교회 동향을 전하는 어떤 기사 안에 담긴 “객관”은 이미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객관을 담보했다고 전제됐다. 물론 제도교회 내부에서도 구성원 간의 이견은 있지만, 교황, 교황청, 주교 (또는 주교회의), 사제의 발언은 이러한 것을 다 수습한 최종결론, 즉 객관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해서, 가톨릭 언론은 공정과 객관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보도가 공정과 객관이 논란이 되는 상황에 처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 결과, 공정과 객관이 논란이 될 수 있는 문제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방법론과 그에 담긴 의미들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발전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막상 자신의 보도가 편향되고 주관적인 기사가 되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은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즉 공정과 객관이 선험적으로 보장돼 있다고 굳게 믿고 부러 의심하지 않는다.(주5)

즉, 현재의 가톨릭교회는 그 자체가 저널리즘이 자극받고 발전하기에 좋은 여건이 아니다.

가톨릭 안에서 저널리즘의 발전이 늦어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교회가 말하는 스타일은 대부분이 연역적 방식으로 어떤 결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길고 장황한 경우가 많다. 교회개혁을 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들도 이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교리조차도 그렇다.(교회의 화법이 장황한 것은 오랜 교리 논쟁의 결과이기도 하다.)

교회 언론은 그간 제도교회의 발언을 전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해 왔기에 그 기사문도 이러한 제도교회의 화법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닮게 되었다. 이러한 스타일은 결론이 정해져 있지 않거나 갈등이 담긴 새로운 사안을 보도하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 이러한 기사에 익숙한 언론과 그 종사자는 결론이 주어지지 않은 사안을 보도하는 데 익숙하게 될 기회가 많지 않다. 독자 또한 그러하다.

한국 교회 안에서 저널리즘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은 “선교지 교회”론에서 비롯한다. 즉 한국교회는 아직 보편교회 안에서 충분히 성숙한 교회로 인정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 것이 객관적 상태이고, 교회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이 상황에서는 교회의 존립과 성장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일은 피하고 도움이 되는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어른 교회가 아니라 아직 어린이 교회이니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골라 먹이고 가르치듯이 해야 하고, 교회 언론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교지 교회론의 근거는 한국 교회의 주교 임명이 교황청 주교성을 거치는 (서구) 어른 교회와 달리 선교지 교회 주교 임명을 다루는 인류복음화성을 통한다는 데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주6)

한국교회 전체가 어린이이니 여기에 속한 개별 신자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아시아에서도 한국 교회에 유독 강하다는 성직자주의는 이로써 더 강화되고 사제들은 신자들을 어린이로 보고 “배려”한다.(주7)

교회언론에서는 신자들에게 “해로운” 것을 골라내 보도대상에서 제외하고 좋은 소식만 보도한다. 나쁜 소식도 애써 중화하거나 좋은 맥락으로 바꿔 설명한다. 평신도는 안타깝지만 아직 어린이이니 중요한 교회 일을 직접 맡길 수 없고, 이 중요한 일에는 교회의 얼굴인 교회언론의 편집권도 당연히 포함된다.(성직자 가운데도 훌륭한 언론인이 있다. 성직자는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2) 보도의 예의

2016년 5월, 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장이던 유경촌 주교가 <평화신문>에 보낸 특별기고문에서 교회 매스컴에게 “공동체의 성숙과 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비판 기능은 포기할 수 없는 교회 언론의 역할”이라고 강조하면서, 또한 “(교회언론은 교회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예의를 지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주8)

일반적으로, 비판은 언론의 본질적 사명이며 기능이다. 그런데 이 “비판” 앞에 “예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라는 수식어는 원래 불필요했으며 특정한 용도로 쓰였다는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비판” 앞에 “예의”는 불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여전히 “비판”하면 그 자체가 “사랑”과 반대라고 떠올릴 사람도 아직 적지 않다.

하지만 유 주교 글의 취지는 “교회언론이 교회 자신을 비판해야 한다”는 데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덧붙여진 “예의”는 독자에 따라서 다양하게 읽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의 교회 현실을 반영하는 맥락이 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현재의 교회는 내부 논의/이견/불화를 공개적으로 처리하는 데 아주 낯설고 서투르다. 특히 종교개혁으로 생긴 “교회 분열”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또한,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면서 공화정 주류 사회와의 불화를 “피해”로 인식해 왔다.(주9) 여기에는 언론과의 불화도 포함된다.

언론과의 불화는 언론의 본질인 저널리즘에 대한 경원과 이해부족, 공포로 이어졌고, 현대 교회에서 자신의 대내외 활동에서 매스컴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매스컴을 마치 하나의 스피커처럼 도구로 이용하는 데에만 국한시키는 경향을 낳았다. 즉 저널리즘의 수용은 거부하고 그 효용성만 챙기려는 것이다.(주10)

그럼에도 교회는 결국은 20세기 중반에 민주주의와 화해했듯이 서서히 언론, 즉 저널리즘도 수용해 가고 있다.(주11)

유 주교의 “예의 있는 비판”은 이 과정에 참여하는 상당한 독자층의 우려를 인식하여 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경청해야 할 선의의 권고다. 무비판에 익숙하고 당연시하던 가톨릭교회 안의 독자들이 교회 일을 두고 사실을 보도, 검증, 비판하는 저널리즘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한 단계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달리 말해, “저널리즘”은 그 자체가 진실과 사회, 취재원과 독자에 대한 예의를 추구하고 보장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해 온 작업과정이기에 굳이 “예의”라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예의의 부족”을 느낀다면 그것은, 가톨릭교회처럼 저널리즘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고 그래서 독자들이 익숙하지 못한 격차가 있어서 느끼는 부분을 제외하고도, “저널리즘”의 실천이 부족한 때문이지 “예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는, 가톨릭교회 안에 저널리즘에 충실한 언론이 없다면 예의 있는 언론 또한 없다고도 할 것이다. 모든 언론은 저널리즘에 충실함으로써 진실에 예의를 갖춰야 한다.

 

2. 저널리즘의 효용성

 

1) 신뢰의 문지기

근래, 사회 일부에서는 기성 언론의 편파성, 주관성을 지적하면서 독자들 스스로가 뉴스를 생산, 유통, 소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개인 뉴스의 발달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미 예견되기는 했지만,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과 강하게 연결된 점, 직접 민주주의의 한 증표로 여긴다는 점 등이 특징이다.

그런데 모든 이에게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이러한 정보 민주화를 통해 세상은 더 평등해질 것이라는 꿈은 컴퓨터를 처음 개발한 사람도, 인터넷을 처음 만든 사람도 같이 꿨던 꿈이다. 그러나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비대칭 자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치 지금 생산기술이 발달하여 아무리 못사는 사람일지라도 2000년 전 진시황제보다 더 우월한 물질문명을 누리지만, 사회적 빈부격차는 그때와 비교하기 힘든 것과 같다. 즉, 개인 뉴스가 발달하면 뉴스 세계의 민주화가 확대될 것처럼 여기는 것은 꿈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는 많아질수록 오히려 검증이 더 필요해진다. 유한한 유기체인 인간 개개인에게는 이 검증에 쏟을 시간과 돈, 에너지가 한정돼 있고, 결국 집단(또는 제도)으로서의 검증기구나 특별한 능력을 갖춘 몇몇 개인들이 더욱 유리해진다. 많은 개인들이 정보 민주주의의 꿈에 부풀어 혼자 정보의 바다에서 항해하려 시도해 보다가 포기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정보/뉴스에 대한 반 지성주의로 빠진다.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은 유지한 채, 너무 많은 정보 분석에 지쳐 분석에 필요한 지성 자체를 경원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뉴스를 권위 있게 판단해 줄 새로운 뉴스 공급자를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가 힘을 얻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어떤 정보를 수집/판단/가공/생산한 것이 뉴스라면, 이것을 직업적/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언론기관이고 언론인이다.(주12) 개인들이 접하고 처리해야 하는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정보의 진위와 효용성을 판별해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문지기(gate keeper)로서 권위 있고 신뢰성 있는 언론의 필요성은 더해 갈 것이다.

그러므로, 과제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가톨릭교회에 관한 뉴스의 문지기로서 신뢰를 얻는 데 있다. 그것은 현 단계에서는 저널리즘의 여러 기본 원칙을 충실히 구현해 나가는 것이다. 사실을 보이는 대로 쓰고 왜곡하거나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으며, 뉴스 꼭지 하나하나를 간결명료한 하나의 정보 단위로서 효율적으로 제공함으로써 독자에게 봉사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이 잇달아 등장하는 가운데서도 어디에서나 계속 유지해야 할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물론 이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물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저널리즘은 때로는, 상당부분은, “노가다” 작업으로,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은 일정한 저널리즘 소질과 훈련, 경험을 갖춰야 그 노가다를 할 수 있다. 정보의 양이 많아진다는 것, 그리고 검증해야 할 정보가 복잡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른바 “가짜 뉴스”는 그 빈틈으로 빠져나와 반 지성주의와 진정한 뉴스에 대한 환멸을 부추기고 또한 그를 바탕으로 더욱더 창궐한다.(주13) 교회 내부 또한 마찬가지다.

 

2) 제도교회를 넘어

또한 가톨릭 언론은 스스로가 제도교회의 화법에서 이어 온 연역적 설명의 태도와 방법론의 습관에서 벗어나 개별 사실에 기초한 귀납적 화법을 적극 발전시켜야 한다. 주제에서 결론이 빤히 보이는 연역적 기사는 설사 그 주제와 주장이 혁명적이라 할지라도 이미 상당수 독자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상투적인 것이다. 어떤 이는 기사 주제가 보수냐 진보냐를 떠나 그 화법 자체가 제도교회와 같을 때 거기에서 “제도교회”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에 한국 천주교 평협에서 번역해 냈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억눌린 자의 교육학)는 제도교회의 주입식 교리교육을 비판하며 민중 주체적으로 지식을 생산해 내는 인식론, 교육론, 조직론으로 지금도 유효하고 더 절실하다.(주14) 이를 언론활동에 적용해 보면, 언론에 내재된 사회적 대화와 교육의 측면에 대해서는 모두 부인하지 않지만,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 방법론이 또한 바로 “저널리즘”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저널리즘이 약하다면, 모두가 좋은 언론을 바라지만 막상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효용성은 저널리즘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집단 내부, 예를 들어 교회에서 더욱 크다. 격차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필요하면 비판하는 본격 저널리즘 언론은 교회에는 처음에는 낯설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또 그 효용성 또한 조금씩 체감된다. 민주주의가 비용이 들고 얼핏 보면 비효율인 것 같아도 길게 보면 그래도 가장 효율적인 정치제제인 것처럼, 언론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민주주의도 처음에는 그 본성이 반 복음적이라고 규정했지만 20세기 중반부터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언론의 비판적 속성이 불편하고 때로는 복음과 어울리지 않게 보이겠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다.

유경촌 주교는 앞서 말한 <평화신문> 기고문에서 교회언론의 교회 자체비판을 촉구하면서 “교회 매스컴이 교회 공동체의 성장과 영적 성숙을 위해”, “진실을 보도하고 상충하는 의견들을 조정하는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발제자는 교회가 성숙해지는 데 언론의 역할은 있으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언론 없이 성숙해지기 어렵다. 19세기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교회개혁을 놓고 비오 9세 교황과 격렬히 대립했던 평신도인 액튼 경은 당시의 교황 권력에 대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경고했다. 공개적으로 비판받지 않고 검증받지 않는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더 쉽게 썩는다. 지금은 로마 교황청조차 바티칸은행의 사정을 외부 회계법인을 돈을 주고 불러 감사하고 보고서를 공개함으로써 투명성을 확인받는다. 어떤 집단이 스스로를 감시할 독립 언론을 갖췄다는 것은 바로 그 집단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증명하는 지표이며 성숙하고 균형 잡힌 합의와 의견을 모아낼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 집단 내 언론의 수준만큼 그 집단 전체의 의견과 주장에 힘이 실린다. 그러므로 교계제도에서 독립된 언론이 있다는 것은 바로 교회공동체 전체 –교계제도 포함-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제도교회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독립언론을 지지하고 지원하고 만들어야 한다.

끝으로 덧붙여, (독립된) 교회언론에 대한 제도교회의 태도는 또한 그 자신의 말, 그리고 자신의 하느님에 대한 증명서이기도 하다. 교회가 평소에 사회에 대해서는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촉구하며 자신의 언론에는 반대의 원칙을 적용할 때, 신자들은 선행과 공정을 권하는 교회의 말, 사제의 말을 진정성 없는 가식이나 (사제니까 알면서도 말하는) 실현성 없는 이상주의 담론으로 “이해해” 주게 된다. 나아가 스스로도 사회와 교회에 대해 그런 이중적 태도, 신앙의식, 사회태도를 갖게 된다. 교회가 몸으로 그렇게 가르치며 그런 신자들에게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라고 말하기 어렵다.

 

주1. https://www.americanpressinstitute.org/journalism-essentials/what-is-journalism/

주2. https://www.americanpressinstitute.org/journalism-essentials/what-is-journalism/elements-journalism/

주3. “내가 원래 있던 일간지를 떠나 <가톨릭 레지스터>의 편집장으로 간다고 하자, 내 동료 하나는 이렇게 물었다. ‘왜 언론(journalism)을 그만두려 해요?’ 그는 마치 내가 어둠의 세계로 넘어갔다는 식의 뜻으로 이렇게 솔직히 말한 것이다.”(https://www.wcr.ab.ca/This-Week/Stories/entryid/6899)

주4. 모든 사물에 “가톨릭”이라는 명시적 세례를 주지 않으면 비가톨릭적인 것으로 보고 불안해 하는 사고방식은 2000년을 전후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후반기와 베네딕토 16세 시기에 특히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에 “가톨릭적 정체성”을 외형적으로 드러낼 것을 강력히 요구하던 교황청 사회복지평의회 의장 로베르 사라 추기경이 대표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를 경신성사성 장관으로 전보시켜 사회복지에서 손을 떼게 했다.
또한, “가톨릭 저널리즘”에 대한 기계적이지 않은 다른 이해의 예도 있다. 일반 언론의 저널리즘 원칙을 받아들이되 다른 일반 언론과 달리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사랑, 희망, 믿음, 종말론적 전망 등, 즉 신앙을 철학 기초로 해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저널리즘+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주5. 근래 여러 이유로 기존 교회언론도 보도 범위의 주제가 사회 문제로 많이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사 양식에도 일정한 변화가 보인다. 예를 들면 한 기사 안에서 주된 취지와 반하는 (주로 비판받은) 당사자의 반론을 포함시키는 방식이다. 교회 바깥 언론들은 첨예한 이해가 대립하는 문제들을 보도하면서 공정성/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이러한 장치를 다양하게 발전시켜 왔다.

주6. 한국교회는 1962년에 교계제도(hierarchy)가 설정됐는데, 이것이 좀 묘하다. 즉 일반적으로는 교계제도 설정은 해당 교회가 어른이 되어 자치할 수 있다는 성인증명서였으며 그 뒤로는 주교 임명은 주교성을 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때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도 이례적으로 주교 임명은 여전히 인류복음화성을 통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당시 이 사실을 보도하던 가톨릭시보는 이것이 교황청의 배려인 것처럼 한국 신자들에게 해설했다. 교계제도는 대교구(속교구를 포함한 관구)가 2개 이상 될 규모와 역량이 되어야 설정한다. 한국교회는 당시 서울대교구,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 등 세 대교구가 설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7. 실은 성직자들도 자신을 성인이 아닌 어린이로 인식하는 듯 보인다. 이는 교황청이나 자기보다 상급인 성직자를 대할 때, 그리고 (이미, 언제나, 어른인) “사회”와 관계할 때 특히 그러하다. 어른이 아직 못 된 어린이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그 내부에서의 개개인의 서열과 성숙성에 상관없이 본질상 모두 어린이가 된다.

주8.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465

주9. 이에 대한 다른 이해는, 프랑스 혁명 등으로 가톨릭이 막대한 토지 등 기득권을 빼앗긴 것은 오히려 교회가 가난해지는 “은총”이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주10. 19세기에 서양 과학기술 문명을 접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이와 비슷한 논리구조로, 중체서용론이나 동도서기론을 내세웠다가 실패한 바 있다.

주11. 교회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역사적으로 지닌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 언론에 대한 공포.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는 20세기 중반 2차대전으로 민주주의의 세계적 승리가 확실해지면서 해소됐고 언론에 대한 공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서 언론과 동행하는 경우가 많아 많이 풀렸다. 여기에는 교회 안에서도 지역적 격차가 크다.

주12. 더 넓게 보자면 사회-정보제공자-취재기자-편집국-독자-사회로 이어지는 큰 순환 고리 속에서 이 과정이 이뤄지고, 각 단계에서마다 각 담당 주체는 각기 자기가 마주친 정보를 선택/수집/판단/가공하여 다음 단계의 담당자에게 넘기는 문지기(gate keeper) 역할을 한다.

주13. 최근,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한 개별적인 뉴스 문지기들이 총체적으로 이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주14. 이 시기 반독재 학생운동, 그리스도교 운동에서 이 책은 필수 학습이었고, 전두환 정권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당시 평협에서 왜 해방신학과 연관이 깊은 이 책을 번역(1979)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 일부에서 교회쇄신을 위해 남미 기초교회공동체 운동을 배우려던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서울대교구는 1978년에 신자들을 “반”모임으로 묶었는데, 당시 서울대교구 사목국장이던 오태순 신부가 남미 기초교회공동체를 돌아보고 온 뒤 본떴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소공동체” 운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제2회 가톨릭 저널리즘 세미나에 참석한 독자들. ⓒ달군

토론 : 한국 가톨릭에 없던 공론의 장이 되길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 논설위원

 

최근 가톨릭 내 한 단체의 회장을 만나 대화하던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대한 호평을 들었다. 지금까지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매체는 서울대교구의 <평화신문>과 <평화방송>, 대구대교구의 <가톨릭신문>이다. 그러나 기존 매체들이 크게 보아서 교구에서 발행하는 주보와 큰 차이가 없어서 ‘언론 기능’을 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려웠는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생겨 판에 박힌 정보 외에 가톨릭과 관련된 신선한 뉴스들도 접할 수 있고, 한국 가톨릭에서도 ‘공론의 장’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박준영 편집국장의 발표문에 “원래 있던 일간지를 떠나 <가톨릭 레지스터>의 편집장으로 간다고 하자, 주위에서 ‘왜 언론을 그만두려고 하느냐’고 물었다”고 썼듯이, 이른바 공급자의 선전 도구로 활용하는 기관지는 ‘크리티시즘’(비판)이란 기능을 지닌 ‘언론’으로 대우를 받기 어려웠고, 가톨릭계 매체들도 그런 류로 취급을 받았다. 잡지까지 영역을 확대해 찾아보아도 가톨릭에서는 영성과 품격을 갖춘 잡지들은 적지 않지만, 문제를 비판하거나 공론을 이끄는 언론 기능을 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개신교가 <기독교사상>이나 <복음과상황>, 또 불교가 <불교평론>에서 논쟁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과 비교해서도 가톨릭 언론의 지평이 좁아 보인다.

박준영 편집국장은 발제문에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과제를 ‘가톨릭교회에 관한 뉴스의 문지기로서 신뢰를 얻는 데 있다’고 밝혔다. 신뢰는 모든 조직의 생명과도 같다. 특히 종교나 언론처럼 도덕성을 무기로 하는 조직은 신뢰를 잃어버리면 존립 근거를 잃어버릴 수 있다. 따라서 신뢰를 얻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신뢰를 얻느냐 못 얻느냐의 핵심은 도덕성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대중들이 언론을 접하는 창구도 과거의 지면에서 인터넷에서, 모바일로, 지금은 유튜브 등 동영상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그런 변화에 뒤처질 경우 언론은 대중들과 만나기가 어려워진 형국이다.

그런 하드웨어적 창구만이 아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에스엔에스의 등장 이후 대중들의 발언 통로가 활짝 열렸다. 예전엔 기존의 언론들만이 뉴스를 독점했지만, 지금은 어떤 방송도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올리는 트위트의 속보를 따라갈 수 없는 지경이다. 또한 대중들이 사회 현안에 대해 자신들의 발언 수위를 높이면서 기존의 언론 기자들을 ‘기레기’로 폄하하며, 주 무대에서 밀어내기도 하며, 대중언론 시대를 열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카르텔의 붕괴와 성역의 파괴다. 권위주의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민심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옴과 동시에 이런 인터넷, 에스엔에스의 활발한 소통이 그런 현상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특유의 보수성과 아직은 순종적인 신도들의 경향성으로 인해 주교와 사제들이 이런 변화를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기존의 권위주의는 거대한 민심이란 파도 앞에서 중대한 위기에 놓여 있다. 종교는 여성과 함께 최후의 성역의 자리를 지켜 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종교만큼 동네북도 없다. 그야말로 종교는 시대 변화상에 맞춰 ’사회 및 대중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가톨릭은 2000년 역사를 지닌 보수교단이지만, 한국에서는 독재시대 민주화 인권의 선봉에 섬으로써 상당히 진보적인 구실을 해온 게 사실이다. 오히려 사제와 수도자들이 그처럼 시대를 앞서 견인해 나갔기 때문에 가톨릭의 언론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독재·권위주의 정권이 물러나고 변화된 상황인 작금에는 가톨릭이 낙태와 동성애, 페미니즘 논쟁 등에 떠밀려 전례 없이 보수 편향 쪽으로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중들의 인식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자칫 사회적 공의의 수준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사회현안에 대해 잠자다 봉창 두드리는 식의 해법을 내놓아 ‘딴나라 종교’로 인식되게 할 위험성마저 있는 셈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존재 가치는 여기에 있다. 가톨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교단과 변화된 민심 사이의 갭이 갈수록 처지고 있는 상황에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야말로 소통의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위치다.

논자가 일하고 있는 <한겨레신문>도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언론들이 민심의 목소리를 반영해 주지 않은 데 대한 민초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1988년 창간된 이후 기존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성역들을 과감히 다루었다. 한겨레신문이 부수에 비해 높은 신뢰를 얻은 데는 억눌린 민심을 대변해 준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한국 가톨릭 내 한겨레신문으로 볼 수도 있다. 신뢰는 적당한 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분야를 다룸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을 한겨레신문이 익히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지금은 워낙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민심의 요구가 거세져 한겨레신문도 비판에 직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앞으로 가톨릭에서도 변화의 속도는 거세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교황-추기경-주교-사제들의 말이 절대화됐지만, 앞으로 수도자뿐 아니라 평신도와 여성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질 것이다. 그동안 교회를 이루는 주요 축이면서도 언로가 제한됐던 평신도와 여성의 발언권 신장은 시대의 요청일 뿐 아니라 새시대 교회의 요청이기도 하다.

특히 사제들의 성문제도 더욱더 부각될 수 있다. 서구에서는 사제들의 성폭력·추행이 주요뉴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가 비교적 성역으로 남아 이를 뉴스화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성역 파괴 분위기와 함께 오히려 황색저널리즘이 가장 입맛을 다시는 아이템으로 성직자의 성 문제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가톨릭적 특수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먼저 공론화한다면, 관음증적인 황색저널리즘의 관점이 아니라, 더 나은 가톨릭으로 개선하기 위한 좀 더 실제적이고 합리적인 논의로 이끌 수 있다. 자칫 호사가들의 흥밋거리나 희화의 소재로만 사용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주교와 사제들이 이런 공론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성역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민심의 봇물에 의해 더욱더 처참한 위기에 내몰릴 수도 있다. 따라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사회 변화와 가톨릭 사이에서 펼치는 공론의 장이야말로 한국 가톨릭과 성직자 자신들을 위해서도 가장 소중한 공기가 아닐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지금여기 가톨릭뉴스>가 있는 것은 한국 가톨릭으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생방송 동영상 1부 : https://www.facebook.com/catholicnewshan/videos/260455258139337/

생방송 동영상 2부 : https://www.facebook.com/catholicnewshan/videos/295161271301870/

9월 12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10주년 저널리즘 세미나 2회가 계동 씨알재단 사무실에서 열렸다. ⓒ달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10주년 맞이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의 다음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많은 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3회 11월 28일(수) 저녁 7시
- 경동현 (편집위원장, 전 우리신학연구소장)

4회 2019년 1월 23일(수) 저녁 7시
- 정현진 (취재팀장)

5회 2019년 3월 23일(토) 3시 대중강연과 10주년 기념미사
- 강연자 : 김지영 (전 <경향신문> 편집인,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장)
- 주제: 저널리즘과 가톨릭 언론의 미래(가제)

1-4회 장소 : 서울시 종로구 계동2길 26 2층 씨알재단
5회 장소 : 추후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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