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며칠 전 주말, 인천 연수구의 한 마을 행사를 다녀왔다. 그 마을 모임의 고문이라 해마다 시간을 내는데 올해는 결혼 40주년을 앞둔 선배 내외가 전통혼례를 재현하니 도중에 슬며시 달아날 수 없었다.

점심으로 주최 측은 잔치국수를 준비했고 기다리는 사이 인절미와 절편, 그리고 막걸리와 돼지 편육을 내놓았지만, 1000인분을 한순간에 끓여 내는 건 불가능했다. 따로 마련된 내빈석에서 지인들과 이야기 나누며 국수를 기다리는데 주방 쪽에 사단이 났다. 기다리다 지친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역정을 내는 게 아닌가. “저자들은 뭔데 편안하게 앉아 먼저 국수를 처먹는가?” 절편 겨우 몇 조각 입에 넣었지만 미안했다. 어르신을 얼른 자리로 모신 젊은이들은 자원봉사자였는데, 국수 받고 술이 깬 어르신은 자리를 뜨면서 무척 계면쩍어 했다.

하마터면 휘두르는 지팡이에 다칠 뻔했지만 배식을 마칠 때까지 쫄쫄 굶은 주최 측과 자원봉사자들은 험악했던 상황을 슬기롭게 풀어냈다. 행사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 기다리다 노여워진 노인의 편에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행사를 이벤트회사에 맡겼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비용으로 업체에 맡기면 행사는 깔끔하고 뒤탈도 없겠지만 주민은 마음을 나누기 어렵겠지. 겉은 번듯해도 속이 공허한 행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다.

예매를 위해 버스 터미널을 가면 대개 자동발급기 앞에 선다. 줄이 긴 창구보다 간편하기 때문인데 치킨 프랜차이즈 식당도 그게 대센가? 저녁 뒤까지 이어지는 회의를 서울숲의 한 공간에서 마치고 근 40년 만에 왕십리역으로 지인과 나갔더니 예전 분위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깔끔해진 역 광장에서 외국계 치킨 프랜차이즈 식당이 가까웠고 맥주도 팔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바삐 돌아가는 주방의 젊은이들은 주문을 받지 않는다. 손님이 모니터에 입력해야 했는데,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어렵사리 주문을 마치고 주위를 살피니 이런! 자리를 차지한 대부분의 젊은 손님들은 혼자였다. 이 시간에 ‘혼밥’인가?

시내버스에서 차비를 걷던 차장은 꽤 오래전에 자취를 감췄다. 그 시절의 기억을 추억처럼 간직한 사람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요즘 대중교통 요금은 교통카드나 신용카드가 대신 지불한다. 그러고 보니 거스름돈이 부족한 택시가 많은 반면 요금을 둘러싼 사소한 말다툼이 사라졌는데, 기억으로 남을 이야기는 그만큼 줄었을 것이다. 대학가 식당은 현금이면 500원 깎아 준다고 방을 붙였는데, 젊은이들은 작은 돈까지 카드로 결제하나? 아니란다. 카드도 불편한지, 손에 늘 붙어 있는 휴대폰이 해결한단다. 하나같이 통신 대기업이 주도하는 이른바 무슨, 무슨 ‘페이’다. 간편한가?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될 텐데.

인터넷으로 옷이나 책을 몇 차례 주문하면 고객의 취향을 살핀 광고가 쏟아진다. 개인정보 수집의 동의를 받은 기업에서 고객의 취향을 수집해 정교하게 분류했을 테고, 서비스란 명분으로 판촉에 나서는 거겠지. 대신 개인정보를 내놓은 개개인은 감시된다. 페이든 카드든, 사용 횟수가 늘어나면서 분류는 한층 정교해진다. 성별과 나이는 물론이고 사는 지역과 지위를 구분해 그들의 취향과 행동을 예측하고 그에 맞는 광고에 열을 올릴 것인데, 수집된 정보를 기반으로 맞춤 광고를 남발하는 기업은 서비스라고 우길 게 틀림없다.

'히키코모리', 갈리아 오프리.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디지털 원주민’은 인터넷으로 쇼핑해서 택배로 물건을 받는다.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비밀번호의 지뢰를 피하지 못하는 ‘인터넷 이주민’과 달리 디지털 원주민은 택배기사들의 고충을 일일이 헤아리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대순가. 이제 인공지능이 내장된 냉장고는 집 주인의 취향을 저격하는 메뉴를 그때그때 제안하고 그에 필요한 식재료를 알아서 주문한다고 한다. 방대하게 수집해 분류한 자료들을 ‘딥러닝’하는 가전제품 기업들은 냉장고를 소유한 고객의 상황에 맞게 변덕스런 식성까지 만족시킨다는 게 아닌가. 인공지능의 승리인가? 찬란한 편의의 순간인가? 식당이든 집이든 혼밥이 대세로 자리 잡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출판사가 재작년 다시 펴낸 "나홀로 볼링"은 혼자 볼링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는 미국의 사회현상을 우울하게 분석한다. 그들은 그나마 볼링장으로 나갔는데,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편의는 집에 홀로 은둔해도 불편 없는 일상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른바 ‘히키코모리’의 일반화다. 자청해서 집 안에 꽁꽁 묶여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세상에 인공지능은 가상커뮤니티를 얼마든지 창출한다. 굳이 귀 어두운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청할 이유가 없다. 그래도 가끔 밖에 나가야 한다면? 집 밖에 자율주행 승용차가 대기하지 않던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딥러닝이 가능한 거대 기업의 인공지능은 이세돌 9단을 게임스코어 4대1로 이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히키코모리 족의 식단을 제안하고 활발한 여성의 올겨울 화장 패턴도 제시하겠지만 13억이 넘는 중국 인구의 인상을 기억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 중국뿐이겠는가? 웬만한 국가의 중앙컴퓨터는 용량이 막대하다. 세계 74억 인구의 인상은 물론이고 행동반경과 사상의 변화도 예의 주시할지 모른다. 행동반경과 인상착의를 조작해 알리바이를 창출하는 행위는 아직 삼가고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기자를 타국까지 따라가 살해하는 정부라면 뭘 못하겠는가. 1932년 올더스 헉슬리가 구상한 "멋진 신세계"가 이제야 구현되는 셈인가?

휴대폰의 가상 커뮤니티에 갇힌 청소년이 사냥을 위해 어린이 놀이터를 기웃거리는 일은 마을이 살아 있던 과거에 없었다. 히키코모리를 부추기는 최첨단 편의에 중독된 사회에서 개인은 현실세계에 약하다. 주어지는 편의에 그저 익숙해지면 그만이다. 가상 커뮤니티 공간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집 밖에서 만나는 이웃의 눈을 바라보는 기술이 어렵거나 두렵고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 낯선 이의 친절이 마냥 귀찮을지 모른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방해하는 자에 강한 반감을 가질 수 있다.

최근 신문기사의 제목은 내일을 불길하게 만든다. “불친절하다”며 얼마 전 PC방에서 20살 알바생을 살해한 자는 기자의 분석처럼 우울증을 앓고 있을까? “콤플렉스 건드렸다”면서 낯선 여인의 목을 졸라 살해한 자는 징역이 두렵지 않을 거 같다. “임금 못 받아서” 엉뚱한 행인을 흉기로 위협한 40대는 이 시대의 자화상과 거리가 멀까?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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