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지난 10월 14일에 새롭게 성인 7명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구성을 보면, 6명이 성직자 혹은 수도자입니다. 유일하게 평신도가 한 분 계시고 아주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분이었습니다.  “Nunzio Sulprizio”. 비오 9세가 가경자로 선포했고, 1963년 바오로 6세가 그를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2018년 10월 14일에 눈치오 술프리치오는 자신을 복자품에 올렸던 바오로 6세 교황과 함께 시성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삶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한 청소년, 그런데 시성이 된 한 청소년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속풀이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이탈리아의 페스코산소네스코(Pescosansonesco)에서 태어난 눈치오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가 재혼하셔서 양부를 만나게 되었지만 양부는 눈치오에게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자신을 지켜 주었던 어머니마저 6살이 채 안 된 눈치오를 남겨 두고 숨졌습니다.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지만, 어머니를 잃고 3년 뒤 할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어린 눈치오를 외삼촌이 거둬들였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은 조카를 거칠게 대했습니다. 외삼촌은 교육을 받아야 할 조카를 학교에서 빼내어 대장간 일을 배우도록 시켰습니다. 눈치오는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눈치오 술프리치오 성인.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외삼촌은 눈치오에게 대장간 일 말고도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습니다. 사계절 맨발로 긴 거리를 오가야 했고 누더기 옷을 걸치고 궂은 날씨에도 쇳덩이와 같은 무거운 짐들을 날라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외삼촌은 조카에게 체벌, 욕설을 퍼붓곤 했으며,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매우 추운 어느 겨울날 아침, 외삼촌은 눈치오에게 대장간의 철을 배달하라고 시켰고, 저녁에 돌아온 아이는 다리가 붓고 심한 열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외삼촌은 그를 치료해 주기는커녕 괴롭혔습니다.

발의 상처를 씻기 위해 목발에 의지해서 찾아간 우물가에서 사람들은 환부에 냄새가 난다고 그를 쫓았습니다. 눈치오는 마을에서 더 떨어진 외딴 우물가에서 상처를 씻어야 했습니다.

1831년 4월에서 6월까지 눈치오는 그 부상 때문에 입원하게 되는데, 의사들은 그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구박은 더 심해졌고 눈치오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빵을 얻고자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이 이 심각한 상황을 군인이었던 눈치오의 친삼촌(프란체스코 술프리치오)에게 알렸습니다. 친삼촌은 눈치오를 데려와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대령에게 조카를 소개합니다. 자비롭고 신심이 깊었던 대령은 눈치오를 아들이라 불렀고, 눈치오는 대령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1832년부터 약 두 해 동안 나폴리의 병원에서 온천 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건강의 일시적 회복세를 경험했습니다. 목발을 놔두고 지팡이 하나만으로 거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836년 초부터 상태가 심각해졌고, 그해 5월 5일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이 불우한 청소년이 성인이 된 경위에는 절차상 기적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이 아이가 그 고통스런 삶에서도 기도하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환자들을 도왔다는 증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눈치오를 기술을 배우는 이들과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삼았습니다. 눈치오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성인들의 영웅적 모습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가 누리는 일상을 통해 우리 각자가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성인입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친절을 베풀고 하느님이 늘 함께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그것이 대부분 슬픔과 고통으로 이루어진 짧은 생을 살았던 눈치오 성인이 우리에게 남겨 준 모범이라 하겠습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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