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10월 21일(연중 제29주일) 이사 2,1-5; 로마 10,9-18; 마태 28,16-20

이번 주일 한국 교회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한 나라의 복음화는 항상 그 나라 사회의 흐름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차원의 구원의 필요성을 일깨운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의 영향을 받아 한국교회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사회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폐막 바로 전날 반포된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은 이전까지 교회문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사목헌장의 첫 문장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교회는 외딴 섬처럼 홀로 거룩함을 외치는 곳이 아니고 인간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와 함께하는 사회 공동체에 긴밀히 결합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가르침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를 증명합니다. 구약시대의 판관들이 그러하였고, 예언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 속에서 끊임없이 백성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구원역사의 시작이자, 매 부활 밤마다 우리가 기념하고 노래 부르는 이스라엘 탈출사건인 파스카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함께’ 구원하셨습니다. 그 구원 역시 이집트 사회 환경과 무관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전하는 선교, 복음화는 사회의 환경과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공동체를 무시할 수 없고 교회는 끊임없이 그 사회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찾고자 노력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이고 구원 역사를 설명하는 섭리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교황청 훈령, '일치와 발전', 122항)

모든 성사는 공동체적 차원을 지닌다. ⓒ이요안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78항)라는 교황님의 지적처럼 우리의 신앙은 공동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모든 기도의 기본 틀은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미사 경본의 정식 명칭이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Ordo Missae cum populo)라는 것이 상징적입니다. 아무리 혼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구원은 나 혼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힘과 교회 공동체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야 되기 때문이지요. 가톨릭 교회의 모든 성사는 공동체적 차원을 지닙니다.(고해성사까지도!) 열한 제자에게 모든 민족들에게 세례를 주어라고 하신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Ecce ego ‘vobiscum’ sum....) 하고 말씀하십니다. 너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이지요. 그러기에 사제는 교회의 공적 전례를 시작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Dominus 'vobis cum')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하는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우리가 이번 주 기억하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선포라는 것이 단순히 반복된 소리의 전달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글의 처음에 이야기하였듯 그 선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동떨어져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방법이 500년 전과 지금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선포하는 내용은 같지만 그 방법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역사와 함께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나부터 복음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복음화는 역사 그리고 사회 현실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인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 손에는 신문을, 한 손에는 성경을." 복음화는 지금 우리가 땅을 딛고 살아가는 내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번 미사를 드릴 때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번 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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