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 정민아]

'1991 봄', 권경원, 2018. ⓒ(주)해밀픽쳐스

1991년 봄에 일어난 그 사건은 그 시대를 겪었던 이들에게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일명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리던 유서대필 사건 말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 이후, 같은 해 연말 대선 패배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았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1990년대를 맞으면서 더욱 움츠러들고 말았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냉전은 서서히 끝나 갔다. 민주화세력의 거센 도전으로 점차 입지를 잃어 가고 있던 보수정권이 3당 야합을 통해 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자 민주화 인사들은 일대 충격에 휩싸였다. 그 여세를 몰아 노태우정권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운동권세력을 동시에 강하게 몰아붙였다.

정치적 민주화라는 메타담론이 사라진 시대에 대중문화가 사람들의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바야흐로 영화의 시대, 대중가요의 시대였고, 패스트푸드점에서의 만남과 소극장 공연을 보러 가며 풍요를 맛보았지만 가슴 한편은 시리게 무너져 내리던 때였다. 대학가와 노동계는 침울했다. ‘사랑이 뭐길래’를 보며 TV 앞에서 낄낄거리고, 에로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달려갔지만 흉흉해진 사회 분위기를 피해 가기는 힘들었다.

1991년 4월,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던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이 사건은 민주화세력의 분노를 자아내며 1980년대 거리 시위를 재연토록 했다. 그러나 정권은 물러서지 않았고, 대중이 운동권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전과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 봄, 11명의 청춘이 목숨을 버렸다. 그리고 그날, 그 사건이 벌어졌다.

'1991 봄' 스틸이미지. ⓒ(주)해밀픽쳐스

1991년 5월 8일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이 서강대에서 분신했다. 검찰은 김기설의 친구인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해 줬다고 발표한다. 그 당시 검찰총장은 김기춘이었고, 그는 유신시대부터 간첩조작 사건을 만들어 온 공안계의 큰손이었다. 27살이던 강기훈은 동지의 죽음을 부추긴 악질 운동권이 되어 버렸다.

영화 ‘1991, 봄’은 강기훈 사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로 데뷔한 권경원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출신 감독으로 원래는 이 사건을 미스터리물 극영화로 준비하면서 강기훈 씨를 만났다가 그의 독특한 개성에 매료되어 아예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24년이 흐른 2015년 봄, 51살의 강기훈은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는다. 악질 운동권에서 국가 폭력의 피해자라는 이름은 얻었다. 그 세월 동안 그는 암을 얻었다. 이 어처구니없이 한 인간을 비극으로 몰아간 엄청난 사건들의 격랑 속에서 그는 기타를 부여잡고 버틴다. 그래서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를 탐사 다큐나 휴먼 다큐가 아니라 음악 다큐로 봐 달라고 한다.

'1991 봄' 스틸이미지. ⓒ(주)해밀픽쳐스

1991년의 사람들이 2017년, 26년 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영화는 추적한다.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꿰맞추어진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그 후를 조명하고 있다. 사건을 만들어 낸 자들과 강기훈을 도왔던 동료들이 대조적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김기춘은 감독에 있고, 사건을 꾸며 낸 검사와 판사들 중 일부는 박근혜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김기설을 아프게 추억하고 강기훈을 도왔던 동료들은 또 다른 무고한 죽음을 보여 준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1991년 봄을 떠올린다. 나눔과 연대를 삶의 중추로 받아들이게 했던 세상이고 세월이었다.

명동성당 철야농성 중에도 밤새도록 바흐 얘기만 했다는 강기훈은 쿨하고 리버럴한 성정으로 인해 자신에게 닥친 엄청난 비극을 이겨 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기타리스트가 되어 진혼곡과 이별 소나타를 연주한다. 말기 암 환자인 그는 낯선 곳을 여행하고, 사진을 찍고, 햇볕 아래 앉아 온갖 시시한 것들을 즐긴다. 그는 카메라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몇 마디 툭 던지는 말로도 세상사에 초연한 그의 현재를 알 수 있다. 슬픔, 분노, 희망, 그 어떤 기표로 그의 기타 소리를 정의할 수 없다. 그저 그는 연주를 하고 있고, 우리 모두는 그의 기타 소리에서 위안을 얻는다.

암세포와 6줄의 기타 줄로 덩그러니 남은 삶 앞에서도 강기훈의 얼굴은 평화롭다. 시시한 것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끝내주게 멋있는 삶의 모토에 감격하기 전에, 아픔을 예술과 놀이로 승화시킨 그의 강인함 앞에서 머리가 숙여진다. 

'1991 봄' 스틸이미지. ⓒ(주)해밀픽쳐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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