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가장 연대적인 사람 - 맹주형]

2년 전 겨울, 도저히 드러날 것 같지 않던 박근혜 적폐를 드러나게 한 작은 실마리가 최순실 딸 정유라의 이대 부정입학 사건이었다. 승마 특기생으로 입학한 정유라가 수업에 나오지 않고도 학점을 받는 등 각종 특혜 의혹을 이대 학생들이 제기했다. 당시 정유라가 SNS에 올린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글은 국민적 공분을 샀고 그렇게 촛불 혁명은 시작되었다.

얼마 전 <MBC> 'PD 수첩'의 명성교회 보도를 보았다. 등록교인 10만 명, 세계 최대 장로교회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의 부자 세습과 800억 원에 이르는 비자금 문제, 공시지가 1600억 원 상당의 부동산 소유, 재정 담당 장로의 자살 등 충격적 내용이었다. 명일동 일대는 물론 서울에서 제주까지 50개가 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전두환 각하와 박근혜 대통령의 안녕을 기도하고, 의사도 치료한다는 김 목사를 보며 ‘내가 믿는 분과 김 목사의 그분이 과연 같은 분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돈이었다. 실력도 돈이요, 세습도 돈이요, 교회도 돈이었다. 세상은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을 칭송하고 추종하고 모방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드는 질문 하나. 그럼 우리 교회는 과연 세상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2018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포스터. (이미지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개인적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의 덕목을 이야기하라면 교종의 실천을 이야기하고 싶다. 생태계 위기와 가난한 이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발표하고 이끈다. 교종이 지난해부터 만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연대와 실천적 제안이다. 그 상징은 부자 집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가난한 ‘라자로’다. 교종은 말한다. “라자로가 우리 집 문에 앉아 있는 한, 정의나 사회적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당과 신자 집 앞에 라자로를 그대로 놔두고 정의와 평화 같은 소리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올해 '가난한 이의 날'에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시한다.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다.”(시편 34,7) 주님은 가련한 이의 부르짖음을 듣는 분이며, 응답하는 분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신앙인은 가련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해야 한다는 정체성의 확인이다. 교회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돈과 권력의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교종은 다른 결을 사는 교회를 상상하자고 말한다.

우선 가난한 이들은 궁핍한 자들이며, 거부하고 멀리해야 할 불편과 불안을 몰고 다니는 이들이라는 생각을 버리라 한다.(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5항)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은 칭송하고 따르며, 가난한 이들은 소외시키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하며 수치거리로 여기지 않느냐” 일갈하며(8항), 어느 새 자본주의적 가치에 물든 우리들의 머릿속을 흔들어 깨운다.

그럼 교회는 우리 시대 라자로를 안으로 들였는가. 혹여 세속주의와 소비주의에 물들어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만을 짓지는 않았는지. 건물이 있다면 그 안에 하느님 구원의 개입인 가난한 이웃들이 사용할 샤워장은 있는지, 쉼터는 있는지, 한 끼 밥을 나눌 식사 장소는 있는지 묻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가장 먼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께서 그들 삶 안에 가까이 계심을 증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6항)

세상과 다른 결의 교회,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이미 진행 중이다. 청빈을 살며, 자기가 한 선행을 감추고, 가난한 이를 위해 자원봉사하며, 멀리 있는 이주민과 피난민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다. 하지만 가난하고 눈먼 바르티매오에게 다가가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네.”(마르 10,49) 하고 말해 줄 이웃은 더 더 더 필요하다.

맹주형(아우구스티노)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정의 평화 창조질서보전(JPIC) 연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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