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성직주의’는 ‘성직자중심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 출처 = Pxhere)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 어미의 빼어난 미모를 탐한 양반의 욕심 때문에 아비와 어미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하고 구사일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미군 장교가 되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유진 초이’는 연인인 ‘애신 아씨’에게 묻는다. ‘당신이 목숨 걸고 싸우는 그 나라에서는 누가 사는가요. 천민이, 나같은 노비가, 백정이 살 수 있는가요?’ 당연히 양반인 줄 알았던 유진 초이의 물음에 애신 아씨는 대답을 못하고 결국 그와의 이별을 택한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이루려던 바로 그 나라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싸우다가 죽어도 양반으로밖에 죽을 수 없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 회 지나지 않아 멜로로 선회하지만....) 드라마 얘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말이 통하지 않아 정말 답답할 때 1980년대라면 ‘풍자냐 자살이냐’고 비장하게 들이댈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생뚱맞아 보이는 시대이니 한번 돌아가 보자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번 칼럼에서는 미국과 독일에서 70년에 걸쳐 수천 명의 아이들을 천 명이 넘는 성직자들, 주로 사제들이 성폭행하고 주교들이 은폐해 온 일과 한국 천주교 특히 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지적했다. 지금까지 교회 개혁과 관련한 글을 써 왔지만 대개가 교회 ‘지도자’의 문제였고 그런 지도자를 양산해 내는 제도, 곧 구조의 문제로 귀결되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이를 변화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개혁하는 수밖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교회의 99.9퍼센트를 차지하는 평신도는 교회가 잘못되어 감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바꿔 볼 위치에 있지 않다. 무력하기 짝이 없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은 신물 나게 들어 왔지만, 교회 역시 나약하고 한계 많은 인간들의 집단이라는 점에서 이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나라의 표지’로서 교회가 마땅히 가야 할 길임에도 성직자들이나 교계에서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거나 답하지 않는다. 실제 만나면 소박하고 수줍음까지 보이지만 글로는 에둘러 가는 법 없이 돌직구를 날리는 <아시아가톨릭뉴스> 발행인이자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그림 신부는 최근 칼럼에서 성직자, 특히 주교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주교들이) 그리스도와 하느님 백성에게 충실하지 못했음을 드디어 깨달았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위선적 발언들은 무가치하다.... 책임을 받아들이고 사퇴하기는커녕 자기들이 책임 자리에 눌러앉아 상황을 바로잡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그들의 선언은 이제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수준이다.... 나나 다른 이들이 왜 그들을 신뢰해야 하는가? 그들은 감히 불경스럽게도 교회라고 부르는 일종의 바알에게 기꺼이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것을 이제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말이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 '가톨릭 교회의 하나뿐인 반석은', 2018.11.19)

아마도 이 글을 접하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은 ‘거 너무 심한 거 아냐’ 이런 반응을 보이기 십상일 듯하다. 미국 신부라서 미국 교회나 서구 교회에 대해서만 그러려니 생각한다면 오해 말기를 바란다. 그는 오랫동안 일본 <가톨릭신문>의 편집장을 지냈고 아시아 교회의 성직주의에 대해서 많은 글을 쓰고 있으며 최근 몇 차례 한국, 인도, 필리핀 교회를 매우 가부장적이고 성직중심적이라고 적시하기도 했다. 위의 비판적인 칼럼 끝자리에서 그는 ‘500년 전 1차 종교개혁 때처럼 성경의 예수를 반석으로 삼아 전진하자’고 제안한다. 결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은 내가 지난번 칼럼에서 ‘교회 개혁의 끝’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50년 동안 ‘평신도는 성직자의 조력자(assistant)가 아니라 동반자(partner)’가 되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와 신학 이론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한국 교회에서는 과연 얼마나 많은 본당에서 주임 신부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목회의의 결정에 따르고 과연 몇 개의 교구에서 평의회를 열어 교구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는가? 또 1984년도의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같은 전무후무한 경우를 뺀다면 전국 단위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가 모여 논의한 적이 한국 교회사상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이는 성직중심주의가 만들어 낸 불의이자 부정이고 비열함이며 위선적인 반복음적 상황의 결과다. 한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데에서 안도감이 아니라 비애를 느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5년 반 동안 그토록 성직중심주의와 교회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성직자들의 성직중심주의를 바꿔 내지 못했을 뿐더러, “현실은 성직자주의자들은 성직자의 권리와 특권을 지켜 내겠다는 결의만 더 굳혔을 뿐”이다.(편집국, '얼마나 진지하게 성직자주의를 뿌리 뽑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8.10.05) 그러나 아동 성범죄로 걸려든 성직자에게 내려진 ‘천형’이 사제 옷을 벗고 ‘평신도의 지위’로 ‘격하’되는 현실이라는 그림에는 분명 성직중심주의보다 근원에서 따져 봐야 할 계급관계가 존재한다. 더욱이 이번 청년에 관한 주교 시노드를 비롯해 많은 교황청 회의에서 또 교황청 기구에 로비와 정치에 능하고 주교보다도 파워풀한 평신도 단체의 평신도들이 손쉽게 참여하고 있는 현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개혁 드라이브에 가장 약한 고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성직주의’는 ‘성직자중심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의 드라마로 다시 돌아가 이들의 대사를 흉내 내어 묻는다. "성직주의자 당신이 그토록 지키려 하는 교회에는 누가 사나요. 힘없고 가난한 평신도가, 여성이 평등하게 살 수 있나요?" 애신 아씨가 유진 초이를 떠났듯이 어쩌면 이제야말로 성직주의에서 자유로운 교회를 상상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실험해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교회 개혁과 관련해 이미 우리는 ‘그라운드 제로’에 서 있으며 그 끝을 보았기에 이제 새로 시작할 일만 남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으므로 두려울 것도 없으며, 윌리엄 그림 신부의 말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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