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얼마 전 근처 본당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녀원에 위탁 피정을 왔습니다. 창세기의 시작 장면을 함께 이야기하다가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부분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을 각자가 떠올려 보았습니다. 중학생 한 명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습니다. “자는데 그 누구냐, 아담한테서 갈비뼈 하나를 꺼내 가지고요, 예수님을 만들었어요.” 다들 박장대소가 터졌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한 번에 시작되는 새로운 신학에 한참 웃기는 했지만 이 학생의 이야기가 왠지 마음에 남았습니다. 기도하며 보니 질문들이 올라왔습니다. 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인가. 함께하는 데서 오는 각종 고통을 감내하며, 또 서로를 바라고 필요로 하고 원하는가. 

얼마 전 미사 복음에 예수님이 제자를 뽑으신 장면이 나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도 포함되어 있는 명단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 세상 마지막이 어떠하실지 고통 속에 이야기하실 때까지도 자신들 중 누가 위인지 다투고 따져 묻던 이들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피정 중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였다면 훨씬 빠르고 편하게 가셨을 구원 여정을 제자들을 뽑아 함께 가심으로써 더 외롭고 힘든 길을 선택하셨다고. 세상 창조 이전에 계셨고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a) 하며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 사실은 그 의미를 묵상해 갈수록 놀라움입니다.

(그림 1) ‘두 명의 프리다’, 프리다 칼로, 1939. (이미지 출처 = 멕시코시티 현대미술관 홈페이지)

한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워낙 유명하지만 즐겨 보기에는 고통스러운 작품입니다. 한 여인의 두 모습이 두 심장을 잇는 정맥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54)는 자신이 겪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한 이로 유명합니다. 선천적 소아마비와 두 번의 큰 교통사고로 겪은 신체적 고통과 평생 신의를 지키지 않은 남편을 통해 겪은 정신적 고통은 두 가지를 따로 볼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프리다의 인생 전체를 관통했습니다. 이 그림은 프리다가 남편과 이혼한 직후 그린 것인데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열려 있습니다. 왼편 유럽의 빅토리안 스타일의 하얀 웨딩 드레스와 오른편 멕시코 민속 복장을 입은 두 프리다는 독일계 아버지와 메스티조(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혼혈) 어머니에게서 이어지는 두 정체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오른편 남편 디에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들고 있음으로써 그를 사랑하며 행복했던 프리다와(그림2) 왼편 피가 흐르는 정맥의 끝을 간신히 겸자로 지혈하고 있는 고통스런 프리다로 나누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림 2) ‘두 명의 프리다’ 중 부분 상세: 어린 디에고의 사진을 들고 있는 손. (이미지 출처 = 칸 아카데미 홈페이지)

그런데 정작 이 그림에 대한 프리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릴 때 자신에게 있던 상상의 친구를 그린 것이라 했습니다. 주로 자화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녀의 대부분 작품들에 비하면 이 그림은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와 누군가와 이를 나누기를 얼마나 바랐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고통으로 심장이 열리고 피가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는 왼편의 프리다는 오른편 건강한 프리다의 심장을 통해 피를 받아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연결된 이는 자신입니다. 누군가와 이 짐을 나누어 지고 힘을 얻기를 원하는 한편, 고통을 이해하고 살아낼 이, 극복할 이 모두 자기 자신뿐이라는 자각, 그리고 타인과 이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두 명의 프리다를 통해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갈비뼈를 나눈 아담과 하와는 “뼈에서 나온 뼈요 살에서 나온 살”(창세 3,23)이라 외쳤음에도 뱀의 유혹을 거치며 서로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낙원에서 추방된 그들에게서 인류가 태어나고 그 계보 안에 ‘아담과 하와의 후예’로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갈비뼈로 연결된 이들 속에 당신을 위치시키신 그리스도 육화의 신비는 인간의 생김새를 다시 보게 합니다. 고통을 주고 받고 죽음에 이르게 까지 하면서도 그 고통을 나누어 느끼고 위로하며 서로를 살리려 하는 우리를.

얼마 전 위험과 죽음의 외주화의 전형인 화력발전소 석탄 설비 비정규직 노동 현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세상을 떠난 고 김용균 군을 추모하는 이들의 피켓은 ‘내가 김용균이다’였습니다. 김 군의 부모님은 ‘더 이상 아들들이 이렇게 목숨을 잃게 할 수 없다’며 사람들 앞에 서셨습니다. 갈비뼈를 나눈 우리들은 진작 김 군들의 고통과 죽음의 호소를 수없이 겪고 들었으면서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뼈와 살이 함께 아플 수밖에 없도록 창조된 우리 서로의 가운데에 이미 예수님께서 먼저 고통을 나누어 지고 위로를 주시며 생명을 북돋아 주고 계심을 믿게 됩니다. 당신의 그 마음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 책상 오른편에 두고 매일 기도하는 김 군의 피켓 든 사진 속 앳된 손을 봅니다. 나와 뼈와 살을 나누어 받은 이의 앳된 손은 더 이상 처참하게 부서져서는 안 되는 생명, 하느님이 창조하신 존재의 사라진 온기를 전해 줍니다.

어쩌면 피정에 온 중학생이 이야기한 ‘아담과 갈비뼈를 나눈 예수님’은 하느님의 신비 안에 참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김 군은, 프리다는, 디에고는 그 갈비뼈를 나눈 사이입니다. 그래서 서로 고통을 주기도, 서로의 고통에 애가 타기도, 그 고통을 넘어 새 생명을 꿈꾸고 찾을 수도 있는 사이입니다. 우리 가운데 갈비뼈를 나누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이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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