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내가 사는 이곳은 계속 비가 내린다. 이번 주는 아마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더 비가 내릴 거라고 한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따스한 둥지에 있는 새처럼, 아늑하고 또 행복하다. 그러다 이 시간 온몸을 적시며 거리를 서성일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미안해진다. 미국에서 살기 좋은 곳에 꼽히는 이곳 캘리포니아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적지 않다. 이렇게 계속 비가 오면, 집이 없어서 거리에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에 걸린다. 예수님은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지 않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요한 12,11)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 어느 곳을 가든지 몸과 맘이 춥고 힘든 사람들은 늘 곁에 있다. 다만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물론 나도 잘 사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어느 곳을 가든, 그곳이 신자본주의의 메카인 미국이 되었든, 이 지구의 어느 주변이 되었든, 절대 빈곤 속에 있는 사람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에 텐트를 치고 산다는 사실이 놀랍게 보인다.

그런 생각이 들면 내가 사는 동네를 우산 쓰고 기웃거려 본다. 혹시 누구를 만나거든 수프라도 사 주어 보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홈리스(the homeless)는 보이지 않고, 비에 젖은 채 울고 있는 새를 보았다. 대개 비가 오면 새들은 다 어디론가 가서 안 보이는데, 이 새는 이상하게 그대로 나무 처마 끝 난간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안타깝기만 할 뿐 방법을 모른다. 새에 대해서도,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 오던 저녁. ⓒ박정은

그래서 나는 이 주제를 가지고 나의 “사회정의와 영성” 수업안을 작성했다. 우리는 가난의 원인과 구조를 토론하고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우리의 활동 중 효율적인 것은 무엇인지를 토론하기로 했다. 우선 온라인 수업 공간에, 주제를 포스팅하고, 알고 있는 정보들을 과제물로 올리게 했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대안적 사회를 포스팅하게 했다.

지난주에 우리는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삶도 중요하다)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했다. 미국의 인종 문제와 특히 공권력의 문제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인종차별을 가져왔고, 또 왜 미국의 감옥에는 그렇게 많은 흑인 아빠들이 있어야 하는가를 공부했다. 여러 번 강조한 사실은,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교재로 사용한 책 “the New Jim Crow”(새 깜둥이)는 사회가 변하면서 값싼 노동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교육받지 못한 흑인들은 결국 감옥에 간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이었는데, 흑인 학생들이 많이 듣는 이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그저 미래는 너희들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학생들은 놀랍게도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한 학생은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배가 고파서 음식을 공짜로 나누어 주는 곳에 갔었다며, 가족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곳에 대해 이야기했고, 홈리스로 살았던 기억을 이야기해 주는 학생들도 있었다. 또 집에서 무공해 야채나 식품을 재배하는 경우, 그런 식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서비스에 대해 알아 온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오클랜드에 있는 캔티클 농장(Canticle Farm)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땅을 살리고,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는 공간인데, 함께 농사도 짓고, 누구든지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그런 곳이다. 학생들은 그곳을 대안적 희망을 주는 곳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경험을 부끄럼 없이 나눌 때, 그리고 그 나눔들을 부지런히 모으고, 그 모은 자료(data)를 면밀히 분석할 때, 그 공간에서 우리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인도의 한 수녀가 신학자를 꿈꾸며 외쳤듯이, “꿈꾸는 것은 인간의 권리”다. 나는 나의 학생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어떤 형태로든 꿈꾸는 활동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하는 곳은 어디일까? 내가 젊을 때, 꿈을 꾸게 하는 곳은 교회였는데, 지금 이들에게는 과연 교회일까 의문이 든다.

처마 끝 난간에서 울고 있던 새. ⓒ박정은

요즘 교수회의에서 골치를 앓는 주제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는데, 나이가 칠십 넘는 노 교수들은 자신의 교육 철학이나 방식을 전혀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을 “전통”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엇이 전통일까? 전통은 결국 매일 변해 가는 현실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어떤 영성을 계승하기 위해 해석해 나가는 과정이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의 전통이 글자 글대로 초 세기에 해석한 예수 운동을 그대로 보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전통주의자가 수구주의자라는 말에는 절대 반대한다. 나는 예수 운동에 참가하는 수도자로서 전통주의다. 예수님이 했던 전통을 따라 법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기를 꿈꾼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꿈을 따라 그 전통을 해석해야 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를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여벌의 옷가지도 가지지 말고, 신발도 더 가지고 가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이 구절을 얼핏 보면 마치 선교사들이 이것저것 싸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사실은 꼭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지팡이를 가지고 다녀야 하며, 나부터도 나이를 먹으면서 어디 강의를 가려면, 안경, 비타민, 감기약, 컴퓨터, 어댑터, 아이폰 등등 챙겨야 하는 것들이 늘어난다. 다행히 예수님은 그런 목록의 가짓수를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핵심은 그 다음 줄에 나오는데, 손님 같은 마음, 즉 타인의 환대에 의지하는 그런 사회적 약자가 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누구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머물면서, 그 집의 손님으로 지내는 것이 교회 됨의 핵심이다. 교회는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다. 손님은 설사 진리를 지니고 있어도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으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다만 그 진리를 꿈꾸며 그 꿈을 전하는 것이다.

자기가 쥔 진리를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교회에도 학교에도 만연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도전이었던 것은, 결국 그런 빈손이 주는 자유로움이었을 것 같다. 나는 전통주의자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니셨던 마음으로 내 학생들을 만나려고 한다. 또 신참 교수들의 꿈을 잘 경청하고, 노 교수들이 주장하는 전통을 맹종하지 않으면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전통을 지키기를 꿈꾼다. 꿈꾸는 것은 인권의 문제이기에, 꽃으로도, 사랑으로도, 꿈을 깨지 말아야 한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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