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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를 지키는 가난이 교회의 사랑 실천"

기사승인 2019.02.14  17: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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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여기 연중 기획 1] 인권 :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 나승구 신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신년 기획으로 2019년, 한국사회가 직면한 주요 이슈를 어떻게 읽고 대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했다. “노동, 평화, 인권, 농업” 등 네 가지 주제에 대한 교회 안팎의 전문가 또는 당사자로부터 그동안 우리가 각 이슈에서 놓친 것은 무엇이며, 새롭게 인식할 것들은 무엇인지 인터뷰를 통해 들었다.

기사 순서

1. 노동 : 김선기 서울일반노조 교육선전국장 / 부산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이영훈 신부

2. 평화 : 이대훈 성공회대 교수 /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강주석 신부

3. 인권 : 이성훈 한국 인권재단 이사 /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 나승구 신부

4. 농업 : 가톨릭농민회 정한길 회장 /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백광진 신부 
        /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재욱 소장

 

노숙자는 다 게으른 사람들인가? 가난하게 살면 불행한가? 집이란 무엇인가? 일부만을 위한 개발과 발전은 과연 합당한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으로부터 교회는 늘 ‘가난’을 말하지만, 가난은 우리 삶과 신앙 안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체로 와닿기 어렵다. 또 가난을 노숙인, 쪽방촌, 최저임금과 같은 단어로 바꾸어 말하지만, 가난의 본질, 가난이 일으키는 삶의 파장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쉽다. 

오늘의 가난은 무엇이고, 가난이 일으키는 수많은 파편들을 구체적으로 읽고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고 또 가난한 이들을 만나고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의, 식, 주는 곧 인권이자 생명권인데, 먹을 것을 함부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사람이 살 집으로 장난을 치는 것에 대해서는 왜 문제 제기하지 않는가”라는 나승구 신부는, 최근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주목하는 ‘주거권’의 문제로부터 가난을 짚었다. 

나승구 신부에게서 주거권으로 읽는 가난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가난을 교회가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하는지 들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나승구 신부. ⓒ정현진 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주거권, 빈곤, 인권의 관계는?

<나승구 신부> : 빈곤 때문에 침해받는 모든 것이 인권에 영향을 준다. 충분히 갖춰져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나? 예를 들어 밥이 문제라면, 밥을 먹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인데 빈곤 때문에 밥을 못 먹는다면 인권을 아예 말할 수도 살 수도 없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인 의식주에 관한 모든 것이 박탈되면, 인권을 지켜 줄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기본권인 생존권이 인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주거권을 기본권에 넣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계속해서 문제가 돼 왔다. 빈민운동을 하거나 주거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주거권이 기본적으로 제공되지 않아 다른 권리까지도 침해받는 것을 현장에서 많이 본다.

다른 예로, 중산층이 수입의 50퍼센트가 집에 대한 지출이 된다면 그것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내가 번 돈을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나 다른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반 이상을 주거에 쓰게 된다면 나머지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주거권이 실현되지 않으면 다른 기본권이나 인권이 침해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여기> : 가난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나승구 신부> : 교회는 전통적으로 가난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을 좋게 생각했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이나 안식년에 대한 규정처럼 가난이 좋아서 가난을 택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기 것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더 가난한 곳을 선택함으로써 좀 전에 말한 기본권을 박탈당한 이들을 도우려고 한 것이다. 이는 원래 자리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땅도 사람의 권리도 원래의 자리로 돌려주는 것이 희년의 정신이다.

그 교회가 가난을 바라보는 것은 양가적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자기의 부유함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해 다른 이들의 가난을 극복하게 하면, 가난은 극복의 대상이면서 또 하나 권유의 대상이 되는 양가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끊임없이 모든 성인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우리 교회에서는 굉장히 귀한 가치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공동체로서 같이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귀한 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을 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여기> : 가난에 대한 교회 역할의 한계가 있다면?

<나승구 신부> : 가난의 문제에서 교회의 한계가 있다면 법적 조치가 아닌, 윤리적 도덕적 선언이란 점인데 그래서 오히려 더 의미도 있고 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편에 서서 선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그 한계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마음의 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장 큰 한계는 가난하게 살자, 나누자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더 큰 한계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일단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주 활동을 하거나 주 동력원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가난한 이들은 2선으로 밀려나 있고, 정책을 결정한다든지 교회를 움직이는 데서 소외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다. 많이 양보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자들의 교회가 아닐까. 가난한 이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할 때부터 망쳐지는 것이다. 삶이 돼야 하는데 사업이 돼 버린다. 사업이 되는 순간 타당성과 수입, 지출을 따지게 된다. 그런데 수입과 지출, 실익과 효율 등을 따지게 되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교회도 이제는 신자들이 많이 줄고 있어 가난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교회가 가난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다보면 더 가난해지면서도 품위 없는 가난이 될까 봐 우려된다. 가난하더라도 품위를 지키는 가난이라면 우리 교회가 세상이 가진 한계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법은 국회의원 몇 명이 바뀌면 충분히 바꿀 수 있다. 그런데 교회가 행하려고 하는 마음으로부터의 변화, 마음으로부터의 실천은 바꿀 수 없는 지고지순한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가치를 살아가는 것이다. 불변의 사랑과 사랑의 행위라고 할까?

<지금여기> : 가난에 관심없는 사회에서 교회가 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나승구 신부> : 가난에 대한 교회의 선언은 계속돼야 한다. 자신도 가난해져야 할 뿐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삶이 결코 불행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가 보여 주는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저들은 누군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참 아름답다고 답할 수 있도록 말이다. 가난하게 살아도 찡그리지 않고 살 수 있구나, 가난하게 살아도 누군가를 해치거나 탐욕스런 눈으로 다른 이들의 물건을 보지 않는구나. 이랬을 때 그것은 좋은 모범이 되고 좋은 모범은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가난하게 사는 것을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아주 천대하는 이유가 사실 이른바 브랜드 메이킹이라고나 할까? 우리 삶에서 어떤 것이 행복인가의 가치들이 많이 바뀐 것이다. 예전에는 같이 사는 것, 껴안고 같이 가는 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면, 요즘에는 나만이라도 잘사는 게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사회가 사람들에게 많은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리를 펼 수 없게끔 만드는 두려움을 계속 심어 줬다. 특히 전쟁이나 재해, 재난 등은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없게 한다. 나 하나도 살기 어렵다. 이것이 재난사회의 특징이다. 그래서 재난사회에서는 누군가를 돌보고 함께 살았다는 것이 굉장히 큰 미담이 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재난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처럼 돼 버리기 때문에, 가난한 삶에서 점점 멀어지는데 그럴수록 교회는 원래의 자리로 찾아가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람 모두를 살리는 길이다.

모든 사람이 다 부유해지려고 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양산되고, 모든 사람이 다 부유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릴 때, 가난한 사람 하나 없이 같이 살 수 있다는 말도 있듯, 물질이 부족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탐욕이 강해서 가난한 것이다.

<지금여기> : 가난을 사회구조의 문제라기보다 개인 능력의 문제로 보며 가난을 낙오와 패배로 보는 인식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승구 신부> : 이것은 그런 인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문제다. 독재사회에서는 그 사회가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다 배제해 버린다. 일례로 히틀러가 제3제국을 건설한다며 거기서 장애를 가진 이들과 정신병력을 가진 이들을 배제했다. 아이를 못 낳게 한다든지, 수용소에 가둬 사회 활동을 못하게 한다든지. 자기가 뜻하는 대로 가는 데 이들이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도 역시 그런 방식으로 1970-80년대 선진조국을 창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길거리에 있는 것도 못마땅해서 다 트럭에 태워 갱생원이나 형제원 이런 데 보냈다. 시간이 흘러 지금 형제원 사태가 불거져 나온 것으로 이 사회가 저지른 죄악이다. 왜 이들을 이 사회와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만들었는가. 이는 자연적 발전과 성장이 아니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몇몇의 특정 집단이 가진 독재적 마인드에서 시작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 걸인들이 한두 명씩은 다 있었다. 탁발하는 분들도 있었고. 그들에게 싫은 소리 하면서도 밥 한 끼 기꺼이 나눴다. 가난한 사람도 걸인도 우리 동네 사람이라며 같이 사는 방식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배제하고, 도태시키고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우리는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것이 발전인가?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다 떼어내고 ‘아 나는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 몸에서도 한쪽 팔이 불편하다고 한쪽 팔 떼어내고, 한쪽 눈이 불편하다고 한쪽 눈 떼어내면 결국 그게 건강한 것인가? 부족한 것도 같이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온전한 건강이고 그것이 다른 모든 구조에 영향을 준다.

나승구 신부. ⓒ정현진 기자

<지금여기> :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가장 큰 편견은 무엇인가?

<나승구 신부> : 가난한 이들이 게으른 사람이란 것도 사실 그들을 그렇게 보고 게으른 사람처럼 대했기 때문에 그들이 게으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동자동 쪽방의 경우, 그들은 노숙 출신이고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었지만 다시 동자동 공동체를 이루면서 얼마나 삶을 역동적으로 사는지, 삶을 바꾸려 하고 또 다른 노숙자에게 가이드가 돼 주고 이끌어 주며 어떻게든 쪽방으로 오게 해서 살도록 하는 모습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다, 그들이 정신적으로 안 돼 있다는 것은 이 사회가 자기 마음대로 가고픈 대로 가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당장 노숙하던 이들이 집에 오면 갑갑해서 불편하겠지만, 지내다 보면 그런 것도 정리된다. 그런 기회와 시간을 충분히 준 다음에 ‘아 그 사람은 정말 게을러, 정말 일하기 싫어 해’라고 본다면 모르지만 검증도 안 된 일방적인 덧씌움, 꼬리표를 달아 놓아 정말 그 사람들을 가난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얼마 전 북유럽에서 노숙하는 이들에게 집을 먼저 제공했는데 결국은 그들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이 마약을 한다는 등의 편견을 버린 채,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자기를 극복하고 그 가운데서 새롭게 성장하는 경우도 훨씬 더 많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것은 만들어 낸 구조나 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여기> : '지속 가능한 발전'이 논의되는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개발과 발전'에 대한 담론은 여전히 새마을 운동 방식에 머물러 있다. 이에 대한 개념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나승구 신부> : 개발과 발전은 공동체의 모든 이를 위한 공동선이 될 때만 합당한 것이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쫓아내고 일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개발과 발전은 나라와 나라 사이로 말하면 침략과 같다. 거기에 어떤 합당한 이유를 댄다 해도 힘으로써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전쟁을 하는 모든 나라가 선전포고를 할 때 합당하지 않은 이유를 대는 경우는 없었다. 뭐든지 이유를 만들어 내고 전쟁을 유발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라서 전쟁, 약탈, 침략이지만, 개인과 개인 사이 그룹과 그룹 사이에도 분명히 침략과 약탈이 이뤄졌다.

합법적이란 명분으로 개발을 하면서 수많은 이유로 내쫓았다. 유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전쟁 난민을 만들어 냈다면, 여기는 도시 빈민, 철거민이라고 하는 유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들이 어디론가 가서 또 다른 삶의 자리를 만들면 또 쫓아와서 그것을 또 뺏고, 그런 연속이 우리의 개발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의식주는 건드리면 안 되는 것으로 평범한 일상적 기본권이었다. 예를 들어 누가 빵을 싸게 만들려고 석고를 넣는다든지 하면 음식으로 장난친다고 그렇게 공분하면서, 사람이 사는 집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에 대해서는 ‘저 사람은 능력이 있어서 재산을 증식시키는 대가다’라며 부러워하고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나 음식으로 장난하는 이들이나 인간의 기본적 삶을 저해하는 것은 똑같다.

이처럼 집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식에게 집 한 채를 유산으로 남기는 것을 능력 있는 존경받는 부모로 본다. 주거권이 기본권으로 정립됐을 때 감히 사람이 살고 있는 거주지를 자신의 개별적 이익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허물어뜨리는 것이 얼마나 중대 범죄인지를 우리 사회가 공감한다면, 몰래는 해도 이뤄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너무 관대하고 능력이란 이름으로 넘어간다.

사실 희년의 개념도 땅을 다시 돌려주자는 것이다. 땅은 하느님의 것으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 백성에게 다시 돌려주는 개념이다. 이것은 4000년 이어진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까지 이어져 온 개념으로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으로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토지공개념이란 것도 이런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다. 사유재산권이 분명히 인정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토지는 공공의 선에 더 가깝게 쓰여야 한다는 것이 토지공개념의 기본 바탕이다. 내 땅, 내 재산이니까 내가 알아서 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불편해지고 더 나아가 기본권인 생존권조차도 박탈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범죄다.

<지금여기> : 주거문제는 결국 복지문제와 연결된다. 사회복지가 더 튼튼해지면 우리가 미래를 위한 준비로 소진되지 않을 텐데 이에 대한 생각은? 

<나승구 신부> : 집이 기본권이 된다면 걱정 없이 살 수 있고, 그러면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 도시빈민, 청년 문제, 결혼과 출산 문제까지 해결될 수 있다. 집은 모든 것의 기본 터전이다. 터전이 따뜻하고 안락하다면 자살률이라든지 이런 것도 다 해결될 수 있다.

아마 우리 공공주택 비율이 5-8퍼센트대인데 너무 낮다. 도시연구자들은 공공주택이 20퍼센트만 넘으면 전세난을 겪지 않아도, 이렇게 집값이 폭등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본다. 임대주택이라도 10년 동안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굳이 다른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집을 살 필요가 없게 된다. 집을 사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면 집값도 점점 떨어질 테고, 이른바 이 사회경제 체제에서도 충분히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득을 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의 득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복지와 인간의 삶은 굉장히 연관이 많다. 복지가 주는 것은 두려움 특히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이다. 의료의 경우, 70년 벌어서 10년 병원에 가져다 주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건강보험이 좀 더 완벽하게 된다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고, 연금이 잘 돼 있다면 지금 이렇게 아등바등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복지는 모든 사람을 끝까지 웃게 하는 것인데, 이것을 단지 배분의 문제로만 논의하면 계급적 표현일 수 있겠지만, 결국 지금은 가진 사람들의 미래만 보장되는 사회지 없는 사람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 사회다. 그리고 없는 사람들끼리 치열하게 싸우게 만든다. 이른바 엘리베이터 이론이다. 엘리베이터 4대가 있을 때 1대는 사장과 임원만 사용하게 하고, 사람들이 불만이 생기면 한 대는 노약자와 임산부를 위한 것으로, 그러다 애 가지면 집에서 쉴 것이지 왜 나오냐며 불만이 생기면 다시 남자와 여자로 나눠, 여자만 타게 한다. 그러면 지들이 군대를 갔다 왔어 왜 여자만 타게 하나 하면서 계속 싸우게 만든다.

사실 엘리베이터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세대와 계층의 갈등을 조장하면서 정작 사회복지를 제대로 운영해야 할 책임 있는, 이 세상 때문에 돈을 번 이들은 건드리지 않고 수많은 면책과 혜택을 누리면서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게 만들었다. 파이 전쟁이 되면서 이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중 제일 근본이 집이다.

<지금여기> : 빈민사목 30주년 의제가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다 이와 관련해 빈부격차,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신자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나승구 신부> :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도 신자다. 결코 성직자나 수도자의 교회가 아니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많아 보여도 대다수는 평신도다. 우리는 대부분 추기경님이 무얼 하셔야지, 주교님이 신부님이 무얼 해야지, 수녀원이 뭘 해야지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권리와 책임을 몇몇 책임자인 성직자, 수도자에게 완전히 넘기고 그것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가난한 이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평신도다. 왜냐하면 내 옆에 있고 또 내가 가난하니까. 그래서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서로가 서로를 돌보기 시작할 때, 거기서 서로 이웃이 되어 준다. 사실 그것이 교회의 가장 큰 힘이다. 그런데 누가 해 주겠지 생각하면 벌써 물 건너간 일이 된다.

교회의 가장 근간이 되는 평신도가 이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겠다. 이들이 이웃을 정말 이웃답게, 가는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고 괜찮은지 다친 데는 없는지 상처는 없는지 머물 곳은 있는지를 묻기 시작할 때 거기서부터 우리 교회는 소위 말하는 이웃사랑 빈곤퇴치 이런 게 다 되기 시작한다. 정말 그 사람이 어렵고 그냥 두면 죽을 것 같다 하면 상처를 싸매 주고 돌봐 주는 일이 시작될 것이고, 그것을 혼자하기 힘들면 또 다른 이웃을 불러 함께 도와줄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지역의 문제부터 해결될 수 있다. 그 지역의 공동체, 신자냐 아니냐를 넘어 거기 사는 모든 이들이 대처할 수 있도록. 그것이 하느님나라가 아닐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김수나 기자 ssuk316@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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