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규제 샌드박스’라. 우리 정권의 고위층에서 작명했다니 어처구니없다. 명확하고 예쁜 우리말을 찾지 못하겠다면 한자 말을 쓰든가. 세종대왕께 송구스럽게 영어에서 명칭을 동원하다니. 고관대작답지 않게 가볍지만, 명칭이 아니라 내용이 큰 문제다. 촛불 덕분에 탄생한 정권의 정신줄이 점점 이상해진다. 무슨 까닭이 있는지, 애초 약속한 궤도를 크게 이탈하고 있다. 그것도 거침없이.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지 않은 생명공학 분야까지.

1998년 "리메이킹 에덴"이란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프린스턴대학 생명과학자인 저자 리 실버는 머지않아 맞춤형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 책에서 확신했고, 교수직을 그만둔 뒤 생명공학 회사를 차렸다는 후문이 들렸다. 자궁 착상 전 초기 배아의 유전자를 검사해 태어날 아기의 직업을 권하는 건 물론, 질병을 파악해 양호한 유전자로 교환할 시대가 열릴 거라 예측한 리 실버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했다. 아이의 유전자를 바꿔 주려는 부모의 마음을 법으로 차단할 수 없을 거라 점치면서, 세대가 바뀔 때마다 우수한 유전자를 받은 계층은 돈이 없어 교환하지 못한 계층과 구별되고 세월이 지나면 인간은 두 종으로 구별돼 서로 결혼을 외면하거나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는데, 가슴이 벅차오는가?

실제 미국을 중심으로 인간 염색체 안의 유전자 염기서열(유전체)을 파악하는 ‘게놈 프로젝트’가 시행돼 2003년 완성되었고, 생명공학은 염색체마다 나열된 유전자의 지도를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견문이 부족해 그 지도를 현재 어느 정도 정확하게 그렸는지 모른다. 게놈프로젝트 이후 사람의 유전자가 과학자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는 사실은 기억하는데, 작년 11월 드디어 염려하던 사건이 터졌다. 중국의 남방과기대학의 허젠쿠이 교수가 유전자 가위 기술로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는 아기를 태어나게 했다는 보도가 나온 게 아닌가. 에이즈 원인 바이러스의 감염과 관계된 유전자를 제거했다는데, 이를 위해 그는 인간 초기 배아의 유전자를 건드리고 말았다.

지난달 22일 규제 샌드박스 운운한 산자부는 유전체 분석을 통한 맞춤형 건강증진 서비스를 허용하고 말았다. 어떤 생명공학 기업이 갈구해 왔던 사항이라 한다. “개인의 유전체를 분석해 질환의 발병 확률을 통계적 방법을 통해 예측”하는 기술을 확보한다면 국가 경쟁력을 확보할 것으로 장관은 장담했다. 다행인지 아직 모든 유전체가 대상은 아니다. 심혈관과 파킨슨병, 그리고 암을 포함한 13가지로 대부분 노인성 질환이다. 무료로 분석하려 하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은데, 분석을 의뢰한 사람이 인천 송도 신도시에서 나타난다고 하자. 13가지 질환 유전자 중 어떤 하나가 검출되었다는 소견을 들으면 그 사람은 기분이 어떨까? 의사에 매달리고 싶지 않을까? 물론 상상을 뛰어넘는 돈을 준비해야겠지만.

지난 12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규제 샌드박스에 대해 발표했다. (사진 출처 = 중앙일보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할리우드의 유명한 액션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2013년경 이른바 ‘졸리 효과’를 미국에 일으켰다. 분석을 의뢰한 졸리는 유방암과 난소암 환자에 많이 나타나는 두 개의 유전자 중 하나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유전자가 있으면 70살까지 유방암이 70퍼센트, 난소암이 25퍼센트 정도 생긴다는 통계를 의사에게 들은 졸리는 유방과 난소를 암 발생 전에 제거했고 다행히 지금도 건강하다. 그런 행동은 비슷한 수술이 여성 사이에 파급되는 효과로 이어졌는데, 건강하게 나이 드는 여성에 그 유전자는 없는 걸까? 유방암이나 난소암이 반드시 유전자가 원인일까? 유전자의 발현은 환경과 매우 밀접한데, 다른 요인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닐까? 음식이나 스트레스는 무시해도 될까? 관련 연구가 진행되면서 문제의 유전자가 유방암이나 난소암 이외의 암에도 원인이 된다고 한다. 점입가경이다.

유전체를 분석하는 규제 샌드박스 덕분에 13가지 노인성 질환 파악에 우리 기업의 기술이 세계를 선도하기에 이르렀고, 외화가 모여든다면, 특허를 가진 기업은 13가지 질환의 분석에서 만족하려 할까? 산자부를 집요하게 찾아가 분석 범위의 확대를 요구하지 않을까? 한데 생각해 보자. 노인성 질환은 생각보다 돈벌이가 크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의 질병에 비해 치료가 어렵지만 치료비가 클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절박한 마음은 약해질 것이다. 큰돈을 확보한 노인이 아니라면 엄두를 내지 못하겠지만, 은퇴해 물려줄 자산이 없다면? 동서고금의 경험을 미루어, 그 노인의 자식은 흔쾌하지 않겠지.

아이의 질병을 태어나기 전에 파악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게 틀림없다. 리 실버가 예상한 세상이 비로소 실현될 터다. 다만 법과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법은 유럽처럼 초기 배아의 유전체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벌써부터 배아의 분석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우리 생명공학자 사회의 일각에서 거세다. 국회의원까지 흔들 기세다. 배아 유전체 분석을 요구하는 과학자가 내세우는 당위성은 그다지 거룩하지 않다. 황우석 전 교수와 비슷하다. 기술을 먼저 확보한 국가에 권리를 빼앗긴다는 거다. 무슨 권리일까? 치료? 유전자 교환? 어쩌면 부가가치? 다른 나라보다 먼저 기술을 확보하면 대한민국은 부자가 될까? 그렇더라도, 꼭 그래야 하나?

생명윤리학자들은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을 걱정한다. 규제 샌드박스 덕분에 13가지 노인성 질환에 대한 유전체분석 기술이 소기의 목표대로 확보된다면 과학자의 욕구는 그 단계에서 멈추지 않을 게 틀림없다. 분석 범위는 필시 늘어난다. 질병 치료 또는 예방을 위한 조치를 요구하는 요구가 드세진다. 합법적으로 배아를 분석한 의사가 “당신 아기는 야구선수로 키우는 게 좋겠지만 투수보다 유격수가 어울리겠다.”고 조언하거나 “이런! 담배를 피우면 40살 전에 폐암으로 죽을 확률이 80퍼센트가 넘는다.” 하고 경고한다면?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겠지. “스카이캐슬에 입학하려면 최첨단 유전자로 바꾸”라고 은근히 권하는 상술이 득세할지 모른다. 리 실버가 예견한 ‘리메이킹 에덴’이다. 20여년 전 제러미 리프킨은 "바이오테크 시대"에서 ‘제2의 창세기’라며 우울해 했다.

산자부의 규제 샌드박스 발표를 듣고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성명서를 즉각 발표했다. 유전체분석 영리 사업 허용은 건강관리부분 전체를 영리화한 것으로 예견하면서 의학적인 명확한 근거도 없이 “공포 마케팅”으로 국민들에게 장난하는 행위를 강력히 비판했다. 촛불정권이 애초 선언한 의료정책에 역행하지 않는가. 개발 소용돌이로 몰고 갈 ‘예비타당성 면제’에 이어 ‘제2 하느님’을 창조할 규제 샌드박스는 어떤 내일을 예고할까? 초미세먼지와 마이크로플라스틱이 하늘과 땅을 오염시키는 요즘, 다가올 묵시록이 두렵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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