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93]

아이들이 나를 어떤 엄마로 기억해 줄까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영 자신이 없는 거다. ‘당신은 어떤 유형의 엄마인가요?’ 하는 자가 테스트를 하면 일단 성질을 잘 부리는 엄마가 나온다.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계속 화가 나 있는 엄마. 특히 아침에 그렇다. 보통날의 아침이면 자신에 대해 돌아볼 겨를도 없지만, 가끔은 내가 연기 쫌 하는 배우 같아서 놀라곤 한다. 내가 있는 곳이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장르는 재난영화다. 나는 혼돈과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로 생사를 건 다급함, 궁지에 몰린 인간을 연기한다. 감독은 내 연기에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연기에 물이 올랐다는 평이 여기저기서 쏟아지며, 혹자는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 간다고도 한다. 진짜 내가 배우라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감정을 아무리 분출해도 박수 쳐 줄 관객도 없고, 아무리 연기를 오버해도 ‘컷’을 날려 줄 감독도 없다.

스토리는 비슷하다. 멀리 집채만 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고 나는 빨리 피난을 가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듯 “애들아 빨리! 빨리!” 계속 다급하게 외치며 뛰어다닌다. 그때 거울에 비친 클로즈업한 내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재난영화가 아니라 괴수영화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나는 무언가를 해치고도 남을 괴수에 가까웠지만, 초대형 쓰나미를 맞아 본의 아니게 그런 얼굴이 돼 버린 거라고 믿기로 했다.

쓰나미는 점점 더 가까이 몰려온다. 쓰나미와 나 사이의 간격은 제때 출근하기 위해 남은 시간만큼 좁혀지고 있다. 5분 뒤에 나가야 학교든 사무실이든 지각을 안 할 텐데 상황은 50분이 주어진대도 빠듯해 보인다. 피난을 가야 한다는 감정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자고로 신들린 연기자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지 않는다던가. 나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혼자 떠들어 댄다. “어? 내 핸드폰 어딨지? 응? 내 핸드폰 본 사람! 아아! 없어, 없어. 어디로 간 거야. 핸드포오온!” 핸드폰을 손에 쥐고 그런다. 눈앞에 뵈는 게 없는 거다. “얘들아, 지금 뭐하는 거니? 빨리 준비해. 욜라는 일어나. 누워서 그러지 말고 일어나서 옷 입으라고. 메리야, 지금 피아노 칠 때야? 세수부터 해야지! 어서!” 하고 내가 외치는 소리는 마치“ 살아야 돼. 빠져나와야 돼. 죽으면 안 돼.” 하는 것 같다.

카메라앵글이 아이들을 비춘다. 그런데, 웬걸. 놀랍게도 배경은 평화로운 휴양지가 아닌가. 알록달록 진귀한 새들이 뾰로롱 대는 야자수 위 해먹에 누워 주스를 홀짝거리며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꿈꾸는 나무늘보처럼 해먹 위에서 나지막이 몸을 흔들고 있다. 구석에서는 펄펄 날뛰며 사색이 된 내가 뭐라고 고함 치듯 입을 뻥긋대지만 무음 처리된 상태다. 마치 콘트라스트가 강한 흑백사진 같은 장면이다. 지옥과 천국, 악과 선, 어둠과 빛, 혼돈과 평화와 같은 극명한 대비. 그런데 그 대비는 곧 깨지고 만다. 아이들 세계로 쳐들어 온 내가 “지금 몇 시야! 이러고 있을 때야? 엄마 늦었어. 늦었다고.” 하면서 해먹에 가위질을 하고 주스를 탁 엎어 버리는 거다. 아이들이 잉잉 울면서 영화는 그제야 본격적인 재난 태세로 돌입해 CG 처리된 쓰나미가 화면 가득 들이닥친다. 그 속에서 우는 아이들을 재촉해 한 손으로 노를 저으며 집을 빠져나오는 나는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영웅인가. 있지도 않은 쓰나미에 빠져 허우적대는 미친 엄마인가.

욜라, 메리, 로. ⓒ김혜율

아이를 학교에 내려 주고 돌아서며 바로 반성을 한다. ‘어차피 늦은 거, 에라, 모르겠다. 9시 전에 못 들어가면 지각하면 되는 거지. 늦는다고 큰일 나나 뭐. 이 세상은 어찌됐든 돌아간다고. 애들한텐 너무 오버했어. 쓸데없이 흥분해서 고함 치고. 내일은 10분 일찍 준비하자.’ 그런 선량한 의지를 품고 사무실로 간다. 일단 가면 시간은 또 잘 가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을 맞이한다. 그런데 집에 가는 나는 어딘가 모르게 변질된 얼굴이다. 아침의 쓰나미는 물러갔건만 이번에도 상태가 별로다. 휘청거리며 아이들 앞에 나타나는 나의 몰골을 살펴보자. 종일 굽신거리느라 비굴했던 어깨가 으드득 소리를 낸다. 웃기지도 않은데 웃느라, 울고 싶은데도 웃느라 애쓴 얼굴엔 주름이 늘었다. 아름다운 걸 많이 못 본 눈알은 좀 썩어 있고, 긴장이 풀린 입은 헤 벌어져 있다. 이건 완전 좀비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할까 봐 조심하지만, 소시민답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웬만해선 좀비화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강력한 좀비가 아니라, 다 죽어 가는 좀비가 된다. 

그래서는 욜라가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눈을 까뒤집고 ‘우헤헤헤헤. 꺅. 꺅. 끄아아악.’ 등의 소리를 내면서 뛰어다닐 때도 정상적으로 말을 못한다. 어버버거릴 뿐이다. 배터리가 다된 전자 장난감이 내는 기계 음성처럼 ‘그으만 해.’ ‘하아지 마.’라고 말해 보지만 욜라에게 들릴 리 만무하다. 이미 죽었지만 한층 더 죽어 가던 좀비의 손이 순간 꿈틀거린다. 때마침 욜라와 로, 둘 사이 뭉게뭉게 싸움구름이 피어오른다. 구름이 오늘따라 한층 더 격하구나. 1분 싸우고, 1분 쉬고, 1분 사이 좋았다가, 다시 1분 싸우기를 반복하는 형제를 보며 좀비는 서서히 각성하기 시작한다. 뭉게구름에서 천둥 벼락이 칠 때, 좀비 눈에 달깍, 초록색 불이 들어온다. ‘우우우’ 하고 일어나 닥치는 대로 사람을 공격한다. 쓰나미보다 나을 게 없다. 이것도 하루이틀이지 매번 그러니 참 못할 짓이 아닌가. 아침저녁으로 재난영화나 괴수영화 아니면 좀비영화만 찍지 말고 아름다운 동화 한 편 찍을 수는 없는 걸까? 고민 많은 나날들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내가 선배 혹은 언니라고 부르는 귀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게 언니뻘 되는 그녀는 아이를 어느 정도 장성시켜 놓아 여유가 있는 엄마다. 나보다 먼저 고민하고, 먼저 울어 본 선배다. 그런 그녀는 본인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해야 할 것 단 한 가지를 제시해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동화라면 동화 한 편을 찍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였다. 대부분의 좋은 엄마라면 이미 잘 알고 있을, 아주 중요하지만 단순한 열쇠. 괴로움에 커피를 술처럼 들이키는 나에게 선배가 말했다.

욜라, 로, 메리. ⓒ김혜율

“아이들 금방 큰다. 이 시기가 얼른 지나가고 아이들이 빨리 커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나도 그랬거든) 시간은 생각보다 짧아. 이때 엄마가 아이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사실 하나밖에 없어.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주고 자주 안아 주는 것이지.”

“아, 나는 그렇게 못하고 있는데.”

나는 특히 메리, 욜라를 자주 안아 주고 있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도, 들은 지도 오래였다.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걸 미룬 까닭이었다. 로가 태어난 뒤 두 아이를 너무 일찍 큰아이 대하듯 한 내 잘못, 사랑한다 말하고 안아 주는 걸 아끼고 아낀 내 탓이었다.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부터 하면 될까? 아직 늦은 건 아니지?”

“그러엄! 당장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해 줘. 아이들 만나면 한 명씩 차례로 안아 줘 봐. 사랑해라고도 말하고 뽀뽀도 해 봐. 아침에 한 번. 저녁에도 한 번. 아빠까지 동참할 수 있다면 더 좋지. 그러면 봐, 아침저녁으로 아이는 하루에 총 4번을 안기는 거 아니니?”

“응, 그러네.”

나는 당장 집으로 달려가 아이들을 힘껏 안아 주고 싶어졌다.

“할게. 오늘부터.” 눈에서 눈물이 찔금 났다.

언니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이후로 정말 나는 아이들을 안아 주고 있다. 아이들이 차례로 안아 주는 건 하루를 마감할 때 꼭 거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일명 ‘엄마의 허그(HUG) 타임’이다.

그때는 말 안 듣는 아이도, 화 내는 엄마도 모두모두 순해진다. ‘한 번 더 안아 주면 안 돼?’ 하고 메리가 말할 때는 고마웠다. 그런 행복한 얼굴로 안겨 줘서 정말 고마웠다. 아니, 도리어 아이들이 나를 안아 주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거였구나. 서로를 안으며 마음속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이 열쇠만 있다면, 이렇게 서로를 안고 있다면, 후회거리 가득한 하루도 결국은 괜찮아질 것 같다. 우리가 매일 찍는 영화가 어떤 것이든, 장르 불문하고 꽤 아름다울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래서 내가 흠 많은 사람이라 해도, 부족하고 거칠더라도, 나의 아이들 기억 한 모퉁이에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던 엄마로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워킹맘이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