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3월 24일(사순 제3주일) 탈출 3,1-8ㄱㄷ.13-15; 1코린 10,1-6.10-12; 루카 13,1-9

듣기 (이미지 출처 = Pixabay)

저는 개인적으로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사실 보는 것에도 듣는 것이 포함됩니다만 두 가지 감각을 함께 활용하는 것보단 듣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드라마보다는 라디오를, 영화보다는 음악을 즐겨 듣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팟캐스트라는 매체를 자주 애용했습니다. 그중 제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 방송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제목이 조금 인상적입니다. 바로 ‘그것은 알기 싫다’입니다. 모 방송국의 탐사 프로그램의 제목을 본따 만든 이 방송은 제가 신학생 시절이던 2012년 10월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듣고 있는 매체입니다. 제가 이 방송을 좋아하는 이유는 불필요한 중립을 지키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목처럼 주로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내용과 ‘알면 조금 불편한’ 내용들 그리고 나아가 ‘내가 자세히 몰라도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조금 불편해도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팟캐스트 홍보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기가 알고 싶어 하는 내용,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성향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 여러 형태의 신앙의 첫자리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보았던 의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첫영성체를 시작할 때,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리고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도 가졌던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의도가 항상 순수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나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 가끔 활용합니다. 나의 잘못을 애써 감추기 위해 갖가지 미사여구를 그분에게 갖다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본질을 알려 주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존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신 분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나에게 편한 존재로 그분을 바꾸려고만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항상 나에게 편하게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제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의 제목처럼 차라리 알기 싫은 이야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피하고 싶은 그분의 목소리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호한 메시지를 보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3,3)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빌라도와 실로암 탑사건의 예를 들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약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여기에 불필요한 ‘자비’나 ‘사랑’이라는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비롯한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영적 비유로 해석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 비유로 해석해야 될 말씀들도 존재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건은 나 자신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스라엘 탈출의 여정을 통해 ‘있는 나’(탈출 3,14)이신 하느님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탈출의 여정 속에서 하느님께서 자비와 사랑을 지니신 분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단호하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회개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역시 저절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성사들은 바로 그 체험을 도와주는 은총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사순시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회개를 위해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집중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체험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과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에 온전히 마음을 맡기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나의 약함과 불편함을 감추기 위한 불필요하고 의미 없는 미사여구로서의 자비와 사랑을 말하기보다는 내 삶으로 체험하는 진정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불편한 이야기, 알기 싫은 이야기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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