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3월 31일(사순 제4주일) 여호 5,9ㄱㄴ,10-12; 2코린 5,17-21; 루카 15,1-3.11ㄴ-32

남편이 죽자 그녀는 하나 남은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죽은 남편도 내연 관계의 여자가 있었으니, 신애는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조차 붙들 수 없는 외로운 여자다. 그녀를 살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은 오직 어린 아들뿐이다. 그렇게 겨우 고향에서 적응해 나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유괴를 당한 아들이 어느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아들을 죽인 범인은 다름 아닌 아들이 다니던 학원원장이었다. 그녀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던 중 신애는 약국 아주머니를 통해 교회를 다니게 되고, 밤낮으로 미친듯이 하느님께 매달린다. 그러다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살인자도 만날 용기가 생겼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만난 살인자는 신애가 생각한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너무도 태연해서 용서를 구할 사람은 살인자가 아니라 신애 같았다. 더구나 그는 신애가 용서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법이 대체 어디 있는가? 신애는 충격을 받고 넘어진다. 이 이야기는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이다.

오늘 우리가 듣는 하느님, 탕자의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살인자‘는 이미 용서받은 탕자인가? 하느님은 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는 분이시니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이미 예정된 일인가? 황당한 살인자의 선언을 듣고 무너진 신애는 모든 피해자들의 신애이기도 하다. 그러니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가 보여 주는 자비는 공정 없는 자비인가? 큰아들이 시비를 삼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우리 모두의 눈은 큰아들이 되어서 동생과 아버지를 바라본다. 그러나 예수가 이 비유를 꺼내 든 것은 우리식 ’정의‘를 다루기 위함이 아니니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다. 밀양의 살인자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구원과 할렐루야를 외치는 사람들 역시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살인자는 하느님의 제단에 속죄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신애를 찾았어야 했다.(마태 5,24) 이미 수천 년간 계시된 하느님의 속성을 몰랐다 할 셈인가? 그는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그리고 사랑의 신”이다. 그는 한없이 자애롭지만 동시에 분노(복수)의 신이기도 하다. 그의 분노는 자기보다 힘없는 자에게 온갖 갑질을 해 대고, 멸시하고 패고 죽이고, 등쳐서 빼앗아 가는 자들에 대한 분노다. 그의 사랑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 (이미지 출처 = WikiArt)

밀양의 살인자에겐 딸이 있었다. 그 딸은 ’살인자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또다시 뭇사람들에게 낙인 찍혀 부당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때 하느님은 그 딸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가해자가 구할 용서는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제 것으로 삼을 때다. 그가 체험할 자비는 그때다. 자신의 딸 편에 서 있는 그 신으로부터다. 그러니 돌아온 탕자를 맞을 권리는 오직 탕자가 입은 상처(제 탓) 때문에 상처(연민) 난 아버지에게 있다. 큰아들은 아비에 대한 장자의 책임과 의무가 전부였으니, 그에게 연민(상처) 따위란 있을 리 없다. 예수는 ’탕자‘를 미화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려는 아들이 어떻게 끝까지 이기적인지를 보여 준다. 아들은 자기 죄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굶어 죽게 생겨서‘(루카 15,16)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가 보인 회심의 깊이는 이렇게 계산적이다. 하다못해 일말의 도덕심도 없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한 사실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그저 빌어먹을 수 있는 품꾼이 전부다.(17-18) 그를 아들이 되게 한 건 아버지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 신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가 세리와 죄인들의 곁에 섰다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회심한 친구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생각하는 회심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예수가 보인 아버지의 속성은 무릎이 꺾인 자들을 일으키는 것, 작은아들이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되뇌인,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18)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20) 가게 만드는 ’연민‘이다. 그의 연민은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세계를 모두 넘어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암시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회심과 용서‘에 대해 질문을 일으킨다. ’경건하고 도덕적인 (.…)‘ 자들의 폭력은 경건하고 도덕적이어서 위험하다. 그들의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탓이다. 그들의 폭력이 신성한 영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이 우리 사회, 교회, 공동체를 주도하지만 아무도 대놓고 도전하진 못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의로움은 불가침적 영역이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하느님은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더 유명해졌다. 렘브란트가 표현한 아버지상은 말이 아버지이지 누가 봐도 가슴 저미는 ’어머니상‘이다. 가끔씩 그의 그림과 마주칠 기회가 생기면, 그림 속 탕자는 항상 내 모습으로 포개지곤 했다. 내가 어떤 몰골로 돌아간다 해도 아버지는 언제고 저렇게 내 어깨를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나의 감상은 여기까지다. 이런 감상법은 얼마나 자기 연민적이고, 얄팍하며, 가당치 않은가. 그림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실제 큰아들의 세계라는 걸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주 오래전부터 용서할 권한을 쥔 교회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풀어 주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풀리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거룩한 직무자들이(전부는 아니다) 은폐된 담장 안에서 수많은 유소년과 여성을 폭행해 왔는데도 그들은 서로 풀어 주고 용서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얼마나 많은 신애가 절망에 오갔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했다고 제멋대로 손을 털며 일어나는가? 만일 용서를 구하고 싶으면 최소한 자캐오처럼 공공연히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루카 19,8) 다행히도 최근 수년 동안 교황이 이 문제를 공적으로 다루고 있긴 하다. 그렇다 해도 ’용서‘는 여전히 피해자의 영역이다. 그들이 땅에서 풀어야 그때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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