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예수님의 침묵은 승리주의를 이깁니다”

교종,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 베드로광장 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1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전통적 예식으로 거행한 주님수난 성지주일에서 팔마가지와 올리브가지를 축복하고 행렬한 다음 미사를 집전했다. 교종은 강론에서 악마의 ‘승리주의’를 이기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에 이르기 위해 침묵하시고 기도하시며,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고했다. 강론 내용.

예루살렘 ‘입성의 환호와 예수님의 굴욕’. ‘축제의 함성과 사나운 분노’. 이 두 가지 신비는 매년 성주간 시작 때마다 따라오는 것으로 오늘 전례의 두 가지 특징적 순간에 두드러집니다. 곧, 미사시작 때 팔마가지와 올리브가지를 든 행렬과 다음에 이어진 장엄한 수난복음입니다. 그분 고난의 위대한 가르침을 삶의 모델이자 악령을 반대하는 승리의 모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신앙을 갖고 우리 구세주의 길에서 그분을 따라갑시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안에 평화를 지키시며 어려운 순간과 가장 교활한 유혹에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 평화는 초월이 아닙니다. 무감각하거나 초인간적인 것이 아닌 성부와 그분의 구원, 삶, 자비의 뜻에 신뢰를 갖고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명 안에서 그분께서 직접 방법을 선택하시고 아버지에 대한 순명에서 벗어나 ‘자신의 활동’을 행하시려는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처음에는 광야에서 40일간 싸움에서, 마지막에는 수난 중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적인 신뢰를 통해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건에서 세상의 왕자인 악마가 게임의 카드, 승리주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길, 겸손의 길에 충실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승리주의는 지름길, 거짓 약속의 길을 통해 다가오려고 애씁니다. 승리자의 수레 위로 올라가려 애씁니다. 승리주의는 말과 행동으로 살아가지만 십자가의 용광로를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더 열등하고, 결점 많고, 실패한 존재로 판단하면서 부추깁니다. 승리주의의 교묘한 형태는 가장 위험하고,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악의적 유혹인 세속적 경건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을 통해 승리주의를 파괴하셨습니다. 그분을 왕이요 메시아라고 선포하며 외쳤던 백성들, 젊은이들과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는 그 기쁨을 그들과 진심으로 나누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이 지내는 축제와 열정을 보며 기뻤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의 스캔들에 가까운 환호를 나무라도록 예수님께 요청했을 때 그분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겸손이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메시아이시고 임금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 다른 길, 오직 그분과 아버지만 아시는 거룩한 길에 있습니다. 그 길은 ‘하느님의 조건’에서 ‘종의 조건’으로 가는 길,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6-8) 순종하는 겸손의 길입니다. 그분께서는 참된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 하느님께 공간을 내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공간을 내어드리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곧, 자기 비움, 벌거벗음입니다. 침묵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에 대해서는 협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당신의 겸손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걷고자 하셨습니다.

그분 뒤에 제일 먼저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첫 번째 제자였던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동정녀와 성인들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신앙 안에서 걷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삶의 고통스럽고 험난한 사건 앞에서 “특별한 마음의 부담”(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17항)을 치러야 하는 신앙을 통해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밤입니다. 오직 이러한 밤에서 부활의 여명이 밝아 옵니다. 십자가 아래 마리아는 천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했던 말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2-33) 골고타에 있던 마리아는 그 약속의 완전한 부정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당신 아드님이 범죄자처럼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겸손에 의해 파괴된 승리주의는 어머니의 마음 안에서 마찬가지로 파괴됐습니다. 두 분 모두 침묵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마리아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겸손의 길과 순명의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세계 젊은이의 날을 맞아 저는 많은 젊은 성인성녀들, 특히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고, 때때로 그분께서 깜짝 놀라게 우리에게 드러내고 싶어하시는 ‘가까이 숨어있는’ 성인성녀들을 떠올립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것을, 그리고 그분께서는 살아계시며 여러분의 삶이시라고 외치는 것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길에서 그분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아울러 여러분 자신을 버리고, 여러분의 확신을 포기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라는 요청을 느낄 때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기뻐하고 즐거워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나라 길에 있는 것입니다.

축제의 함성과 사나운 분노. 고난 가운데 예수님의 침묵이 응답하려는 유혹과 ‘중개자’가 되려는 유혹을 이기시는 것은 인상적입니다. 암흑과 큰 고뇌의 순간에 그 침묵이 악의에 찬 침묵이 아니라 온유한 침묵이라면 침묵하고 입을 다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온유한 침묵은 우리를 훨씬 더 연약하고 훨씬 더 겸손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용기를 갖고 악마를 찾아내면 그 악마는 나갈 것입니다. ‘자리를 유지하되’ 예수님의 태도와 똑같은 태도로 침묵 안에서 악마에게 대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세상의 왕자 사이에서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손에 칼을 쥐라는 말이 아니라 조용히 신앙 안에서 확고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전쟁을 하러 내려오실 때, 그렇게 하시도록 놓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안전한 위치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의 망토 아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풍랑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리는 동안(마르 4,37-41 참조) 기도 안에서 침묵의 증언을 통해,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희망의 이유’(1베드 3,15 참조)를 제시합시다. 바로 이것이 약속에 대한 기억, 십자가 안에 존재하는 분노와 부활의 희망 사이의 거룩한 긴장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교종, 남수단 지도자들 발에 입맞춤

바티칸에서 국가지도자들 평화를 위한 피정 실시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11일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남수단 대통령과 피정에 함께 참석한 부통령 지명자 리크 마차르와 레베카 냔뎅 데 마비오르 앞에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췄다. 이는 남수단 국가 지도자들을 위한 이틀간 영성피정을 마친 뒤 남수단의 평화를 바라는 교종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의전을 깨뜨리는 파격적 행보였다. 이는 화해만이 그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단순히 서면으로 충고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굳게 느끼게 해준 호소였다. 교종은 남수단 지도자들 발 앞에 몸을 굽혀 무릎을 꿇고 아프리카의 작은 신생국가를 위해 더 깊은 감성으로 호소했다. 이틀간 영성피정을 위해 제공된 산타 마르타의 집의 따뜻한 온기 안에서 교종은 그들에게 미래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애써 숨기지 않고 꾸준히 풀어나가기를 당부했다. 교종은 그들을 형제처럼 대했으며 마음속의 말을 숨김없이 전했다. 또한 이들에게 평범한 시민에서 국가의 아버지가 되기 위한 도전에 맞서라고 당부했다. 교종은 “평화협정에 서명한 여기 계신 세 분에게 형제로서 부탁드립니다.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마음을 다해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당황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문제를 해결해 나가십시오. 여러분은 평화의 여정을 시작하셨고 잘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 사이에 논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논쟁도 전쟁터가 아닌 사무실 안에서, 국민들 앞에서 손을 맞잡고 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평범한 시민에서 국가의 진정한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감히 제가 여러분들에게 진심을 다해 그리고 마음속 깊은 애정을 표현할 수 있길 허락해 주십시오.” 교종은 이 말을 마치고 바로 이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전쟁의 화염이 영원히 꺼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어 교종은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치시키는 것을 바라볼 수 있기를 남수단의 미래가 평화와 화해의 표징 안에 있기를 기도했다. 교종은 감사한 마음으로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평화를 기원하고 받기 위해 피정에 참석한 남수단 국가지도자와 교회 당국자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희망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번 남수단의 평화를 위한 피정은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의장 존 찰머스 목사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국가 지도자는 하느님 앞에 책임져야 한다”

교종, 남수단 국가지도자들에 화해와 평화 호소

 

저는 이 자리의 여러분께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갈등의 결과로 어려움에 처한 여러분의 백성들과 여러분이 힘든 상황을 보내는 가운데서도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평화의 인사말들이 스승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곳 다락방에서도 울려 퍼지길 바라며, 모두 여러분의 젊은 조국이 원하는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 성령강림절에 내려온 불처럼 모든 남수단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이 비춰지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바람을 담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피정이란 외딴 곳을 향해 자발적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내적명상, 기도, 사려 깊은 성찰, 화해의 만남으로 특징지어진 것입니다. 이번 피정은 남수단 국민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거대한 공동책임을 인식하면서 하느님 앞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나라의 건설을 위해 참여하고 활력을 불어넣으며 화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항상 자각해야 하며, 우리가 수행하는 임무란 정의를 갈망하고 목말라하는 가난한 이들의 신음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국가와 종교지도자들인 우리에게 당신 백성을 인도하는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봉사와 행정, 평화에 대한 헌신, 지역사회 공동체 구성원들, 특히 가장 궁핍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행한 선익에 대해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피정은 예수님의 시선 앞에 자신을 내맡기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마치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과 같이 삶의 방향을 바꾼 시선입니다. 주님의 첫 시선은 특별한 사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 선택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선은 예수님을 배신한 뒤에 뉘우친 베드로의 마음을 건드리는 시선이었으며, 이는 베드로의 회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 후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베드로에게 양을 위한 목자 임무를 맡기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베드로의 사명을 삶의 희생과 함께 절정에 이르게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은 무엇인지 자문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시선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시고, 무엇인가를 요구하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커다란 신뢰를 보여주시며, 우리가 더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는데 그분의 협력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게끔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시선이 우리 마음속 깊은 곳도 꿰뚫고 있으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우리를 화해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분의 자애롭고 자비로운 시선은 죄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을 포기하고 평화와 선의 길을 지속하는 데 힘을 실어줍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정의와 화해를 향한 열망을 나타내는 평화의 시선입니다. 남수단 국민들이 이 역사적인 날의 결과에 대해 큰 기대를 품게 될 것입니다. 남수단 국민들은 모든 구성원의 화해와 모두를 위한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오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와 도움이 필요한 이의 부르짖음을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관통하고 정의와 평화를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마음에까지 닿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고통받는 영혼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전쟁의 화염이 완전히 꺼져 마침내 그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평온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땅에 평화가 오기를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구하며, 여러분 백성에게 평화가 올 수 있도록 애쓰는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간청합니다. 평화는 가능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큰 선물이지만 대화와 협상과 용서를 통해 국민을 향한 사람들의 강한 헌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형제애와 연대의 정신으로 평화의 장인이 되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해 여러분을 분열시키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화합하도록 촉구합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전쟁으로 이미 지치고 쇠약해졌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전쟁은 모든 것을 잃게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국민들은 화해와 평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더 나은 미래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9월 서명한 평화협정은 타협의 의지와 화해할 준비를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적대행위 중지와 휴전이 존중되면서 정치적, 민족적 분열을 극복하는 국가건설이 이행되길 진심으로 권고합니다. 저의 소망은 남수단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증언, 영적지도와 인간적 도움으로 평화의 중재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랑하는 형제들인 캔터베리 대주교님과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장님과 함께 남수단을 방문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저희를 성령 안에 날마다 새롭게 하시려고 부르시며 무엇보다 용서의 은총 안에 당신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시나이다. 갈등과 미움으로 갈라진 사람들이 마음을 돌려 화해하도록 아버지께서 이끄심을 체험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와 맺은 계약을 수없이 어겼으나 아버지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세주이신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굳건하고 새로운 사랑의 끈으로 아버지께 단단히 묶어 주셨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원수진 사람들이 다시 대화하고 반대자들이 손을 맞잡아 온 백성이 서로 화합하게 하시나이다. 주님께서 다스리시어 사랑은 미움을 이기고 용서는 복수를 꺾으며 불화는 화목으로 바뀌나이다. 저희에게 은총과 화해의 시간을 허락하시어 저희가 아버지께 마음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고 성령의 활동에 온전히 저희를 내맡기며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장기 기증은 하느님께 대한 봉헌”

프란치스코 교종, 장기 기증 문화 독려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13일 이탈리아 장기기증협회 봉사자 400여 명의 예방을 받고 연설했다. 교종은 기증이란 사회적 책임행위일 뿐 아니라 보편적 형제애이며 낙태와 안락사와 같은 삶의 위협과 반대되는 고귀한 사랑의 행위라고 강조했다. 연설 내용.

장기기증은 사회적 책임의 행위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는 보편적 형제애의 표현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낙태와 안락사’의 삶에 대한 위협과 반대되는 고난의 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눔과 기증에 대한 가치를 널리 퍼뜨리며 증거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사회적 필요성입니다. 이식의학 발전은 사후와 예컨대 신장이식의 경우처럼 살아 있을 때도 다른 인간생명을 살리기 위한 장기기증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는 다른 대안이 없는 많은 병자들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회복하며 좋아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장기기증은 많은 의학치료법 개발에도 불구하고 장기의 필요성이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적 필요성에 답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유용한 행위일 뿐 아니라 인간적 경험과 사랑과 이타심으로 가득찬 행위입니다. 기증의 의미는 자신이나 개인적 필요를 넘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더 깊은 선을 향한 고귀함으로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기기증은 사회적 책임의 행위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는 보편적 형제애의 표현입니다. 가톨릭 교리서에도 “죽은 뒤 장기기증은 훌륭하고 칭찬받을 일이며 헌신적인 연대의 표징으로 장려되어야 한다”(2296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선의 실현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게 됩니다. 기증은 무상의 행위입니다. 신체는 상품이 아닙니다. 특히 칭찬할 만한 예는 “윤리적으로 합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장기기증입니다. 이것은 때로는 다른 희망이 전혀 없는 환자에게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심지어 생명자체의 기회까지 주고자 행하여지는 것입니다”(생명의 복음 86항) 따라서 장기기증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닌 무상의 행위로 유지되는 게 중요합니다. 사실, 모든 형태의 신체 혹은 신체 일부의 상품화는 인간의 존엄성과 반대됩니다. 헌혈이나 장기기증은 윤리적, 종교적 관점에서 존중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봉헌하는 것처럼 기증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신자들은 질병, 교통사고, 혹은 산업재해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주님께 봉헌하는 것처럼 기증의 삶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통 받는 주님께 대한 선물이기 때문에, 법과 윤리의 허가의 범위에서 자신의 장기를 제공하는 것은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성 학대 위기 극복 위해 하느님께로 돌아가자”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종, 교회 내 성학대 관한 기고문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종은 독일 월간지 ‘클레루스블라트’에 기고한 장문의 글에서 교회 내 성학대 스캔들은 점진적으로 희미해지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부재로부터 오는 위기라고 설명했다. 기고문 내용.

기고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부분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사회적 맥락, 곧 1960년대부터 시작된 성혁명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이 시기 소아성애가 허용된 것으로 간주됐으며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측면까지 있으며 이 시기 성소자가 크게 감소하고 많은 성직자들이 사제직을 떠났으며 가톨릭 윤리신학의 쇠퇴와 함께 상대주의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한 일부 신학적 흐름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오직 상대적 평가만 있었으며 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순간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나은 것만 존재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톨릭 신학자 15명이 서명하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과 교회 교도권에 저항하는 외침이 된 ‘1989년 쾰른선언’을 인용하면서 이 시기에 ‘결코 선이 될 수 없는 행동들이 있다는 주장’을 담은 회칙 ‘진리의 광채’가 반포되었다고 회고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시기 윤리신학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교회가 자신만의 고유한 윤리를 갖거나 가질 수 없다는 주장과 윤리분야에서 교회의 권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 교회는 진리와 거짓의 경계가 위태로운 곳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다고 지적했다.

베네딕토 16세는 기고문 두 번째 부분에서 이런 변화가 사제의 삶과 사제양성에 끼친 여파를 설명했다. 그는 당시 여러 신학교에서 거의 공개적으로 동성애자 클럽이 형성됐고 바티칸은 구체적 사항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문제점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당시까지 유효했던 전통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으로 이해됐고, 전통은 새롭고 근본적으로 세상과 열린 관계를 맺음으로써 대체됐으며, 이는 개별주교들이 ‘일종의 새롭고 현대적인 보편성’을 모색하면서 나온 시도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에 따르면 소아성애 문제가 뜨겁게 대두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며 처음에는 처벌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면서 피고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관점에서 가볍게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형사재판을 통해 합법적인 최대형벌(사제직 면직)을 부과하고자 미성년자 성학대 사안을 다루는 주관부서를 신앙교리성으로 정하는 것에 성 요한 바오로 2세와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럼에도 피했어야 했던 지연사례들이 많았으며 이를 위해 프란치스코 교종이 더 많은 개혁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기고문의 세 번째 부분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이에 대한 교회의 올바른 응답이 무엇인지 자문했다. 그는 “세상을 위협하는 악에 대한 해독제는 하느님 사랑에 우리 자신들을 내어 맡기는 것에 있다. 이것이 악에 대한 진정한 해독제다. 하느님 없는 세상은 의미 없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는 더 이상 선과 악의 기준이 없으며 권력자의 법만 남아 권력만이 유일한 원칙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영역에서 하느님이 부재하고 하느님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을 기준으로 척도로 삼는 것이 사라지는 서구사회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이런 사회는 소아성애의 경우처럼 악이 분명해지고 인간을 파멸시키는 사회로 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관점 안에서 성찬례를 그리스도의 희생과 수난의 위대함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베네딕도 16세는 오늘날 교회는 일종의 정치적 도구로만 간주될 뿐 성직자들에 의해 자행된 많은 성학대 사례로 인한 위기는 교회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우리 손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지만 우리가 만든 교회는 그 어떤 희망도 보여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베네딕토 16세는 하느님을 비하하면서 정의로운 사람들이 부재하다는 걸 증명하길 원하는 고발자 악마의 행위를 지적하면서 “오늘날에도 교회는 나쁜 물고기와 가라지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의 교회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하느님의 구원의 도구다. 악마의 거짓말과 반쪽짜리 진리에 온전한 진리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안에는 죄와 악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파괴되지 않는 거룩한 교회가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여느 때보다도 더 순교자들의 교회이며 살아 계신 하느님을 증거한다.”고 반박했다. 기고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살아있는 교회를 바라보고 찾는 것은 몇 번이고 우리 자신을 굳건하게 하며 신앙 안에서 기뻐하게 만드는 놀라운 과업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빛이 퇴색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이들에게 보여 주고자 애쓰는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감사하는 말로 기고를 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교종님!”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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