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가톨릭평론> 편집부]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인도 남동쪽 인도양에 있는 스리랑카는 오랫동안 ‘실론’으로 불린 섬나라다.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 홍차를 많이 생산하면서, 실론티로 유명해졌다. 인구의 70-80퍼센트 정도는 싱할리족으로 대부분 독실한 불교 신자다. 하지만 영국 식민통치기에 인도 남부의 타밀족을 노동자로 데려오면서, 이들이 현재 인구의 약 17퍼센트를 차지한다. 타밀족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어 싱할리족과 인종적, 문화적 차이가 크다. 싱할리족의 민족주의가 강해지면서 타밀족이 분리독립을 요구함에 따라 오랜 기간 내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스리랑카는 불교가 시작된 인도보다 오히려 상좌부불교(소승불교)의 원형과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불교의 전통과 역사성이 강하다. 부처의 치아 사리가 봉안된 캔디의 불치사 사원, 불교벽화로 유명한 담불라 황금사원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불교유적지도 많다. 불교문화 속에서 스리랑카교회는 고유의 신학과 역사를 발전시켰다. 스리랑카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자.

포르투갈의 점령과 초창기 선교

스리랑카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진 팔리어 역사서 "마하방사"(Mahavamsa, 大史)에 따르면, 기원전 543년에 700명의 추종자와 함께 인도 북동부 벵골 지역에서 온 ‘싱하'(사자)의 자손으로 칭하는 위자야(Vijaya) 왕자가 실론섬을 장악하고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스리랑카는 싱할리(사자의 후손)왕조가 16세기까지 통치했다.

싱할리왕조는 기원전 3세기경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여 독자적 불교문화를 발전시켰고, 수많은 사찰을 짓고 승려를 양성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불교가 전파되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남인도 타밀족의 침입이 잦아지고 계속되는 내분으로 싱할리왕조는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11세기 남인도 타밀족의 촐라왕국이 침략해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점령하며 찬란한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들은 죽임을 당했다.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긴 싱할리왕조는 큰 저수지 등 관개시설을 만들고 중세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다시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타밀족의 침입과 내분 때문에 수도를 남부의 담바데니야, 감포라, 코테 등으로 계속 옮겼다. 싱할리왕조는 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분열되어 자프나, 캔디, 코테, 시타와카, 라이가마라는 5개의 소왕국으로 갈라졌다.

1505년 포르투갈 함대가 스리랑카 남쪽의 작은 항구 갈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은 1517년 항구 도시인 콜롬보에 거점을 세우고 교역허가권을 얻으면서 점차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619년에 스리랑카 대부분을 지배했다.

포르투갈 군대와 더불어 선교사들이 오면서 1541년에는 코테왕국의 다르마팔라(Dom João Dharmapala) 왕을 비롯해 몇몇 신하가 세례를 받기도 했다. 다르마팔라 왕은 포르투갈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하려고 가톨릭 선교를 도왔지만, 정작 이들은 세례 이후 신앙교육을 받거나 성사생활을 하지 않았다.

2015년에 시성된 요셉 바즈 신부의 성화.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포르투갈이 영향력을 확대하던 154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수천 명의 카다얀 지역 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1544년에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북부 자프나 지역에 와서 13개 마을에서 1만 명이 넘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리를 가르쳤다. 자프나 지역 사람들은 이런 대규모 개종을 우려하며, 왕에게 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포르투갈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왕은 세례를 받은 이들이 다시 개종하지 않으면 처형한다고 경고하고, 대규모 박해를 자행했다. 1548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박해를 멈추어 달라고 왕을 설득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세력 확장에 맞서던 캔디왕국의 위말라다르마수리야(Vimaladharmasuriya) 1세는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던 네덜란드를 스리랑카에 끌어들였다. 1640년 포르투갈을 무찌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58년부터 새로운 식민세력이 되어 1796년까지 스리랑카를 지배했다. 칼뱅파 개신교 세력이 강했던 네덜란드는 가톨릭에 적대감이 커서 스리랑카에서 가톨릭 선교활동을 금지했다. 네덜란드는 성직자 추방 및 교회 건물 몰수 등의 탄압을 하며 신자들을 박해하고 개신교로 개종시키려 했다. 모든 사제가 추방된 상황에서, 1687년 인도 고아에서 몰래 스리랑카에 들어온 오라토리오회 요셉 바즈(Joseph Vaz) 신부가 숨어서 사목활동을 이어 갔다. 요셉 바즈를 비롯한 오라토리오회 선교사들은 성경과 교리서를 싱할라어와 타밀어로 번역하는 등 가톨릭 서적을 제작했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가 끝날 무렵이던 1793년 당시, 스리랑카에 14명의 오라토리오회 선교사가 400여 개 공소에서 9만 명의 신자를 사목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국의 식민지배와 교계제도의 설립

1795년 영국은 싱할리왕조와 조약을 맺었고, 1796년 실론섬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새로운 식민지배자가 되었다. 영국은 네덜란드가 추진했던 반가톨릭 법안을 1806년 폐지하고 종교자유를 전적으로 부여했다. 영국은 1815년 마지막 싱할리왕조인 캔디왕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영국이 지배하는 19-20세기 동안 스리랑카는 커피, 고무, 계피나무, 실론티를 플랜테이션으로 경작하는 식민 경제체제가 되었다. 이는 스리랑카의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또한 영국이 인도 남부의 타밀족을 노동자로 대거 이주시키면서, 민족 간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국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타밀족을 중간관리자로 중용하고 우대하면서, 싱할리족은 타밀족에게 반감이 커졌다.

영국의 통치 기간에 스리랑카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얻어 다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했다. 스리랑카교회는 그동안 포르투갈 관할이었으나, 교황청은 1834년 실론대목구를 설정하고, 1845년에는 콜롬보대목구와 자프나대목구로 분리했다. 1886년에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콜롬보는 대교구로 승격하고, 자프나교구와 캔디교구가 분리되었다. 1893년에는 갈레교구와 트린코말리교구가 추가로 설정되었고 예수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영국 식민지배 시기에 스리랑카의 선교는 오블라띠회, 실베스터회, 예수회 선교사들이 주로 담당했다. 1893년 레오 13세 교황은 인도와 스리랑카 등 아시아 지역의 사제 양성을 위해 캔디에 교황청립 국제신학교를 설립하고, 예수회에 운영을 맡겼다. 캔디신학교는 1950년 인도에 푸네신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인도와 스리랑카 등의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중심기관이었다.

콜롬보대교구 주교좌 성루시아 대성당.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불교 민족운동과 독립

영국은 그리스도교의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은 이들이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특권을 누렸다. 영국은 승려들의 탁발행위를 금지하고, 승단의 사회적 영향력을 약화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 말 올코트(Henry Steel Olcott) 대령과 블라바츠키 부인(Helena Petrovna Blavatsky)이 설립한 ‘신지학협회'(神智學協會, Theosophical Society)는 서구의 식민통치로 황폐해진 스리랑카 불교문화를 복원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이 공유하는 근본적 가르침이 존재한다고 믿고 탐구하는 신비사상인 신지학은 동양종교인 불교와 힌두교에 관심을 두었다. 당시 스리랑카에서는 구나난다(Migettuwatte Gunananda)라는 승려가 서구의 강압적인 선교활동에 맞서 민족불교 운동을 벌였다. 구나난다는 수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교가 미신이라는 목사들과 교리 논쟁을 벌여 압도적인 논리를 펼쳤고, 이는 스리랑카 불교도들이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논쟁을 접하고 스리랑카를 방문한 올코트 대령과 블라바츠키 부인은 스리랑카의 불교문화를 돌아보며 찬탄했으며, 팔리어로 된 불교문헌을 영어로 번역하고 불교 부흥을 도왔다. 또 올코트 대령은 아난다대학교 등을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깨우치도록 도왔다.

다르마팔라.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구나난다와 올코트 사이에서 통역을 하던 청년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는 이후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불교를 부흥하는 운동과 더불어 서구 식민세력에 맞서는 민족주의 운동을 이어 갔다. 다르마팔라는 스리랑카 불교의 중흥뿐만 아니라, 인도 성지순례를 갔다가 황폐해진 부다가야(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은 장소)를 보고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대각회'(大覺會, Maha Bodhi Society)를 결성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불교 부흥에 앞장섰다. 그는 1913년 미국을 방문했다가 귀국길에 한국에 들러서 석가의 진신사리(佛骨)를 선물했는데, 현재 조계사에 봉안되어 있다. 1915년 영국 정부가 다르마팔라를 비롯한 여러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자 스리랑카인의 분노가 거세졌고, 1919년 싱할리족과 타밀족이 연합하여 ‘실론국민의회’를 결성하는 등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의회에 동등한 참여 비율 등을 두고 갈등이 생겨 싱할리족과 타밀족은 곧 분열되었다.

구나난다.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한편 스리랑카교회는 1939년 칠라우교구가 새로 설정되었을 때, 페레이라(Louis Perera) 신부가 첫 방인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주교품에 오르기 전 사망하여, 1940년 오블라띠회의 방인 사제인 페이리스(Edmund Peiris)가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1947년에는 콜롬보대교구의 교구장으로 방인 사제인 오블라띠회 쿠레이(Thomas Benjamin Cooray) 신부가 대주교가 되었다. 쿠레이 주교는 이후 1965년에 최초의 방인 추기경이 되었다. 1998년 선종한 쿠레이 추기경은 2010년 ‘하느님의 종’(시복 후보자)이 되어 시복 과정에 있다.

독립국가 건설과 싱할리 민족주의의 강화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인도가 독립하고, 스리랑카도 1948년에 영연방자치국인 실론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과정에서 엘리트 집단인 통일국민당이 세력을 장악했지만, 1956년까지 영국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서구적 관점을 지닌 여당의 정책은 곧 민심을 잃었다. 초대 총리 세나나야케(D. S. Senanayake)는 타밀족을 포함한 연립내각을 구성했지만, 이주노동자로 온 타밀족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주장하면서 민족 간 갈등을 조장했다. 게다가 1953년 쌀값이 폭등하고, 스리랑카의 주요 생산물인 고무와 실론티 값이 폭락하여 경제난이 심화되고 시위가 끊이지 않자 결국 총리가 사임했다.

1956년 총선에서 싱할리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스리랑카자유당’이 승리하고, 반다라나이케(S. W. R. D. Bandaranaike)가 총리가 되었다. 스리랑카자유당은 선거 기간 내내 “스리랑카=싱할리족=불교 국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새 정부는 그동안 상용하던 영어 대신 싱할라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정하는 ‘싱할라어 유일법안'(Sinhala Only Act)을 추진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타밀족과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제한하고 싱할리족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타밀족은 이에 반발하며 이 법안을 반대하는 비폭력 불복종운동(satyagraha)을 시작해 법안을 수정하게 했다. 싱할리족과 타밀족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반다라나이케 총리는 1959년 극단주의자인 불교 승려에게 암살당했다. 1960년 그의 부인인 시리마오(Sirimavo Bandaranaike)가 총리직을 이어받아, 싱할리 민족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싱할리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그리스도교 문화를 식민시기의 잔재로 여기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일부 승려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가 학교 운영을 통해 선교활동을 하며 젊은이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끼친다며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통치 시기 가톨릭 교육기관들은 인재 양성에 힘써서, 사회지도층에 가톨릭 신자의 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스리랑카 정부는 1960년대에 그동안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던 모든 사립학교를 공립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764개에 이르던 가톨릭 학교는 이후 47개만 남게 되었다. 1964년에는 국립병원에서 일하던 수녀들을 모두 해고했다. 게다가 외국인 선교사의 비자 발급이 지연되거나 거부되는 등 정부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많은 선교사가 떠나게 되었다. 스리랑카교회는 이를 인권침해라고 항의했지만, 일반 대중의 눈에는 가톨릭교회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참하지 않고 식민시절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비쳤다. 정부는 선교사뿐 아니라 인도 국적의 이주노동자들도 모두 추방하고, 주요 산업들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노선을 택했다.

캔디신학교 성프란치스코하비에르 성당.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이 시기에 스리랑카교회는 1967년 첫 교황사절이 스리랑카에 파견되었고, 1970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오세아니아 지역 방문 귀국길에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스리랑카를 방문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스리랑카교회는 아시아 해방신학과 종교간 대화를 확장했다. 신학생들이 사회학, 경영학, 인류학 등 사회와 연계된 과정을 배우고, 마을과 농장에서 현장체험을 하며, 종교간 대화 촉진과 토착화에 힘쓰는 대안적인 신학교 ‘스바카 스바나'(Sevaka Sevana, 종들의 집)를 1975년에 설립했으나, 창립자인 나나야카라(Leo Nanayakkara) 주교가 1982년 선종하면서 문을 닫고 캔디신학교로 통합했다. 이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오블라띠회 로드리고(Michael Rodrigo) 신부는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종교간 대화를 확장하던 현장 신학자였으나, 1987년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졌다. 또한 오블라띠회 발라수리야(Tissa Balasuriya) 신부는 1971년 가톨릭 사회교리를 알리고 사회활동가를 양성하는 ‘사회와 종교센터’를 설립해 교육하고, <사회정의>라는 잡지의 편집장을 맡았다. 신학자이며 불교학자인 예수회 피어리스(Aloysius Pieris) 신부는 가난한 아시아 사람들을 위한 아시아 해방신학과 불교와 종교간 대화에 관한 탁월한 연구를 전개했다. 이들은 성공회 성직자들과 더불어 에큐메니컬 운동인 ‘정의구현 그리스도인투쟁’을 전개했다.

싱할리 민족주의에 맞선 타밀 반군의 성장과 내전

독립 직후 풍부한 천연자원과 높은 교육 수준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전망이 밝은 신생국가로 여겨지던 스리랑카는 민족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정세가 혼란스러워지고 경제도 어려워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인민해방전선'(Janatha Vimukti Peramuna, JVP)을 중심으로 1971년에 무장폭동과 폭탄테러를 일으켰으나 곧 제압되었다. 시리마오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1972년 신헌법을 공포하여 독립공화국으로 전환하면서, 국명을 ‘스리랑카공화국’으로 바꿨다. 이 헌법개정으로 불교를 국교로 제정했고, 싱할라어를 국어로 규정했다. 이에 앞서 1970년에는 대학 진학에 타밀족 학생수를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에 반발한 북부의 타밀족들은 계속 시위했고,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군과 경찰을 동원해 강경하게 진압했다.

타밀족의 반감이 커지면서 1970년대 중반부터 무장투쟁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프라바카란(Vellupilai Prabhakaran)이 조직한 ‘타밀 엘람타이거'(이하 타밀호랑이,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LTTE)라는 무장 단체가 타밀족 자치국가를 설립하기 위한 분리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다. 무장세력인 타밀호랑이 반군이 정부군을 공격하며 차츰 내전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요사태가 지속되고 경제는 계속 하락하면서, 1977년 스리랑카의 실업률은 50퍼센트에 이르렀다. 결국 시리마오 총리가 사임하고, 1977년 총선에서 자야와르데네(J. R. Jayawardene)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이 승리했다. 자야와르데네 총리는 헌법을 개정하여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제로 바꿨다. 실업률이 줄어들고 경제가 차츰 성장하자, 정부는 민족갈등을 해소하고자 타밀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민족갈등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1983년 7월, 타밀호랑이가 자프나 지역에서 군 순찰대 13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격분한 싱할리족이 폭동을 일으켜 수많은 타밀족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검은 7월’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스리랑카군과 타밀호랑이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타밀호랑이는 자살폭탄 테러로 정부에 극렬하게 저항했고, 정부군은 게릴라를 소탕하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였다. 타밀호랑이는 1993년 프레마다사(Ranesinghe Premadasa) 대통령을 자살폭탄 테러로 암살했고, 1998년 1월 스리랑카 독립 50주년에 유물이자 국보가 보관된 캔디의 불치사를 폭탄테러로 파괴했다.

2002년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해방군은 노르웨이의 중재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발생한 강력한 지진으로 스리랑카 전역이 거대한 쓰나미 피해를 입어 3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등 큰 사회적 손실이 발생했다. 국제사회는 피해 복구를 도우면서,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호랑이가 평화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2006년 2월 다시 두 번째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한 달 만에 다시 격전이 벌어졌다. 군사작전을 전개하던 스리랑카 정부는 내전을 끝내기 위한 총공세를 펼쳐, 결국 2009년 타밀호랑이를 완전히 제압했다. 1983년부터 26년 동안 벌어진 타밀족과의 내전으로 최소 10만 명이 사망했고, 2만 명이 실종되었다. 특히 내전 막바지에 정부군의 진압 작전으로 4만 명의 타밀족이 살해되었고, 약 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내전이 끝난 후에도 스리랑카 정부는 테러방지법으로 인권활동가들을 억압하여, 2014년에는 타밀족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던 인권운동가 마헤산(Praveen Mahesan) 신부와 페르난도(Rukshan Fernando)를 체포하기도 했다. 2015년 대선에서 근본주의 불교 성향의 라자팍사(Mahinda Rajapaksa) 대통령이 물러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종교적, 인종적 차별을 표방하는 종교 극단주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마두 성모성지.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오늘의 스리랑카교회

2017년 교황청 통계(2015년 말 기준)에 따르면 스리랑카교회는 12개 교구에 448개 성당이 있으며, 신자 수는 약 156만 명으로, 약 2000만 명의 전체 인구 중 7.4퍼센트를 차지한다. 주교 21명, 사제 1404명, 여자수도자 2612명, 남자수도자 161명, 평신도선교사 119명, 교리교사는 1만 5201명이다.

2015년 초 프란치스코 교황은 스리랑카를 방문해 스리랑카 첫 번째 성인인 요셉 바즈 신부의 시성식을 거행했고, 마두 성모성지에서 내전에 대한 진상규명을 통해 화해와 치유를 기도하며 평화를 위한 종교인들의 역할을 당부했다. 마두 성모성지는 내전 때 타밀 반군이 장악한 자프나 반도에 있는데, 내전 중에도 싱할리족이 안전하게 순례할 수 있도록 타밀족을 설득하고, 정부에게는 타밀족 피난민을 보호하는 성역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설득하여 양쪽의 합의를 이끌어 냈던 곳이다. 싱할리족과 타밀족 신자가 어우러진 스라랑카교회는 두 민족 사이의 ‘평화의 다리’가 되고자 애쓴다.

* <가톨릭평론>에서 2017년부터 연재하는 ‘아시아에 뿌리 내린 가톨릭’은 독일주교회의 원조기구인 ‘미씨오’(MISSIO)에서 아시아 담당자로 오랫동안 일했던 게오르크 에버스(Georg Evers)가 쓴 "아시아 교회"(The Churches in Asia, ISPCK, 2005 / 원서는 2003년 독일어로 나온 "Die Länder Asiens")를 바탕으로 최신 정보를 추가하여 편집부에서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에버스는 이 책을 재구성하여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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